저 들에 푸르른 솔잎이 되어

상록수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한편, 경제복지회라는 서클에도 가입해서 진지하게 연구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독재 통치는 갈수록 도를 더해 갔습니다. 1967년에 나는 서울 상대 대의원회 회장이 되어, 결국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끌려가서 매맞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지를, 그 일로 강제 징집을 당했고, 1970년에 제대하여 학교에 복학하였습니다.

조용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사회 상황은 철권 통치의 막다른 길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1971년 11월 13일 전태일이 죽었고,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초헌법적 비상 조치인 유신헌법을 발표하였습니다. 나는 모른체할 수가 없었고, 그 현장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971년부터 어쩔 수 없이 피신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 뒤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하는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980년 “서울의 봄”에 이르러서야 잠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여러 선생님의 도움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장이시던 변형윤 선생님, 나중에 총리가 되신 교무과장 이현재 선생님, 그리고 학생과장 강명규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곤경을 무릅쓰고 피신중이던 나를 졸업시켜 주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의 대학 졸업은 친구와 스승의 합작품인 셈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교수가 되리라는 꿈은 버리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출처: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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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