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개 그분을 일컬어 투사, 혹은 신사라고 불렀고, 그분의 정치적 경쟁자들은 때로는 돈키호테, 가끔은 햄릿이라 평하기도 했다.

 

이것이 그 어두운 시절 뼈를 녹이고 살을 태우는 혹독함과 맞서며, 이 땅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시대의 양심 김근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분을 단지 상징으로만 여겼다. 그의 정신을 카타콤에 새겨진 이름처럼 기념하되, 이제는 당신의 시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선명한 정신이 가치기준이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고 단지 과거의 장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그 분이 한미FTA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아파트 원가공개,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경고 등 중요사안에서 고독한 소수가 되거나, 심지어 정치적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양심고백과 같은 무모한 선택을 했을 때, 서슴없이 '바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인의 양심은 설령 돈키호테로 불릴망정 타협하지 않았고, 정치적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특히 지금까지도 남영동을 지나다니지 못하고, 매년 가을이면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의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을 고문했던 사람의 사면을 요청하고 면회를 가던 고인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영락없는 햄릿의 그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어진 18대 총선에서 도봉에서의 낙선과 악화된 지병은 김근태라는 이름을 박물관 속의 박제로 가두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김근태는 우리에게 점점 잊혀져가는 이름이었다.

 

나 역시 그중의 한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전화 한 통에 그 분을 모두 이해한 느낌이었다

 

  
▲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이 조문을 마친 뒤 빈소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박경철

 

나는 고인이 이사장이었던 한반도재단의 이사를 맡고 있었지만, 매번 그분을 부를 때마다 호칭에서 곤란을 겪어야 했다. 사람들은 대개 사석에서 근태형, 김 선배, 근태야라고 호칭하지만, 나는 매번 의원님, 의장님, 장관님, 고문님이라고 호칭을 바꿔 불러야 했고, 심지어 낙선 후 야인으로 계실 때는 대학의 초빙교수라는 사실을 빌어 잠시 교수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것은 내가 그의 민주화 투쟁의 여정에 단 한줌의 힘도 보태지 못했고, 어둠의 시기에 그분의 삶과 정신을 증명할 자리에 한 순간도 같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는 그의 민주화 투쟁의 여정이 어떠했는지, 그 삶을 증거할 기억이 하나도 없다. 다만 어느 날 뉴스에서 그 분이 양심고백 후 정치적 위기에 몰렸고, 그 후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혹시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면 소송비용을 지원해 드리고 싶다'는 편지를 썼던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 때만해도 그 분을 법률적으로 지원해 줄 변호사가 일개 대대는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단지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저 분에게 빚을 졌다는 순진한 생각의 발로였을 뿐이다.

 

편지를 쓴 후, 정중한 거절과 함께 깊은 사의를 담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아직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전화선 너머로 전해진 목소리는 투사나 정치가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따뜻하고 정중하며 깊은 인품을 가진 사람의 그것이었다. 단지 전화 한 통화에서 마치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두 이해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한반도 재단의 이사를 맡게 되었고, 지난 총선에서 생애 처음으로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해서 도봉에서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그런 인연들 속에서 나는 피상적으로 알았던 김근태라는 거인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항상 "고마워", "미안해"와 함께 했던 그

 

  
▲ 1988년 6월 30일 출소 환영식 중 이해찬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김근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김근태

이 글에서 그분의 철학과 사상을 전부 논할 생각은 없지만, 그분이 전공인 경제뿐 아니라, 통일과 외교, 복지에 이르는 사회 전 분야에 혜안을 가진 위대한 사상가였다는 사실만은 꼭 말하고 싶다. 특히 동북아정세와 평화에 대한 그분의 인식과 식견은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어 국가와 민족의 미래라는 본질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고, 그분은 한시도 그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분은 뼛속까지 애국자였으며,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면서도 온유했으며 선량한 분이었다. 내가 그분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고마워'라는 말이다. 당신이 밥값을 내고서도 '고마워', 말년에 그분을 괴롭혔던 파킨슨병에 대해 안부를 물어도 '고마워', 그 분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늘 미안해했다. 당신을 존경하며 청년시절부터 함께해 온 당신의 동지들이 곤궁한 처지에 있음을 미안해했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청탁 한 번 하지 못하는 자신의 맑은 양심에 늘 미안해했다. 그 점에서라면 그 분을 햄릿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다. 나는 가끔 저런 분이 그런 혹독한 고문을 견디며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설 수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으로부터 직접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의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지만, 피가 곤두서고 머리털이 쭈뼛 설 만큼 혹독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였다. 아이히만의 후예가 좀비가 되어 이 땅에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조국과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던진 김근태와, 애국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그를 고문한 자의 영상이 겹쳐졌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왜곡되고 악용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당신은 어지간해서는 그 때의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았고, 지인들에게도 고문 이야기는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은 이렇게 사회적 보상을 받았지만, 뒤안길에 쓰러져 간 훨씬 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끔찍함을 겪고서도 자신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그분에 대한 미안함과 존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눈물 나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구'라고 직접 쓴 명정을 취재기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명정은 장사 지낼 때 고인의 관직과 이름 등을 기재하고 관 위에 씌워서 묻는 붉은 천이다.
ⓒ 유성호
 김근태

그분은 거인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뿐 아니라, 온화함과 유머,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넘치는 휴머니스트였다. 또 돌보지 못했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자상한 가장이기도 했다. 올해 말,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조차 힘들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줄 한 줄 글을 남겼다. 그 글에는 그가 평생 사랑했고, 헌신했던 국가와 사회, 민주주의를 위한 염원이 녹아 있었다.

 

그는 꽃이었다. 피었다 지면 그뿐인 꽃이 아니라, 씨를 티워 열매를 맺는 영원의 꽃이었다.

 

생전의 그를 두고 햄릿이라 칭한 사람도 빨갱이라 부른 사람도, 혹은 영웅이나 투사라고 부른 사람도 우리는 다 같이 그분에게 빚을 졌다. 이제 우리가 그 분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은, 져버린 꽃, 인간 김근태를 넘어선 그의 꿈과 염원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그것이 우리시대를 살다간 영웅,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 평화인에 대한 우리들의 진정한 애도이자 조문이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구"

 

세상에 이보다 더 뜨겁고 눈물 나는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붉은 천에 쓰인 흰 글씨 앞에 눈물로 이 기억을 바친다.

Posted by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