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 유성호
 김근태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대표적인 고문 피해자인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투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근태 상임고문도 따뜻한 남자였다"는 작가 고 박완서씨의 글이 회자되고 있다.

 

박완서씨는 1992년 6월 김근태 상임고문이 옥중편지를 모아 펴낸 책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의 발문을 썼다. 박씨는 발문에서 "'김근태는 투사다'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김근태는 괜찮은 남자다'라고 말해줘도 조금도 실례가 된 것 같지 않다"고 밝혔다.

 

박씨는 "그 짐승 같은 시간에 일어난 하늘 무서운 일을 낱낱이 생생하게 증언할 수가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던 그가 외경스러운 나머지 고문자 못지않게 독한 데가 있는 사람이려니 여겼다"면서도 "그가 옥중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자기만 아들딸 있는 것처럼 알뜰살뜰하고도 살갑고 따뜻한 그의 부정에 절로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났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용기란 냉엄이 아니라 따뜻함이라는 걸, 강함이란 날카로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라는 걸 확인한 것 같아 기쁘다"고도 했다. 고 박완서씨는 담낭암으로 2011년 1월 세상을 떴다.

 

다음은 박완서씨가 쓴 발문 전문이다.

 

나는 고문자도 치가 떨렸지만 김근태도 사실은 무서웠습니다.

 

용기란 냉엄이 아니라 따뜻함입니다.

 

김근태씨를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먼 발치에서 본 적도 없습니다. 그의 이름을 언제부터 알았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된 것은 그가 폭로한 고문사실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마 1980년대 중반고개를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눌려 허덕거리며 넘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법정에서 진술한 끔찍한 고문 내용은 신문에도 났고 더 상세한 건 유인물을 통해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같은 인두겁을 쓴 사람끼리 그럴 수가 있을까? 그가 외친 그대로, 정말이지 인간성에 대한 절망으로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그 후 때때로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만일 그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보곤 했는데, 나라면 고문도구만 보고도 아니 고문자의 얼굴만 보고도 그 앞에 구더기처럼 기면서 그가 원하는 모든 사실과 모든 이름을 술술술 말해버릴 게 확실했습니다. 그러니 나 같은 건 운동하는 사람하고는 이름도 모르고 지내는 게 수였습니다. 무슨 엉뚱한 화를 미칠지 모르니까요. 아무리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가 소원이라 해도 나로서는 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짐짓 눈감고 귀먹음으로써 획득한 그 무렵의 나의 안일엔, 그런 뜻으로 김근태란 이름 자체가 고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나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근태는 다시 감옥에 있고, 그를 고문한 기술자는 어디선가 백주의 대로를 활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잔혹한 고문자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게 무섭고도 치욕스러운 것 또한 1990년대의 고문입니다.

 

나는 고문자도 치가 떨렸지만 김근태도 사실은 무서웠습니다. 도대체 어느 만큼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가졌기에 그런 무자비한 형벌을 견디고도 살아 남아 온전한 정신과 기억력으로 그 짐승 같은 시간에 일어난 하늘 무서운 일을 낱낱이 생생하게 증언할 수가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던 그가 외경스러운 나머지 고문자 못지않게 독한 데가 있는 사람이려니 여겼습니다.

 

얼마 전 처음으로 그의 부인 인재근씨를 만나보고 그가 옥중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기만 아들딸 있는 것처럼 알뜰살뜰하고도 살갑고 따뜻한 그의 부정에 절로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났습니다. 독할지도 모른다는 오해도 풀렸거니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어서 외경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그와 친해진 것 같은 묘한 안도감까지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용기란 냉엄이 아니라 따뜻함이라는 걸, 강함이란 날카로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라는 걸 확인한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했구요. 아이들이 잘 자라는 모습 또한 여실해서 대견하고, 그밖에 가족, 친척, 친구 등 애정 넘치는 분들이 그를 그답게 받쳐주고 있다는 게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빨래를 하다보면' 같은 글을 읽으면서는 괜찮은 남자치고 여자 무시하는 남자 못 봤다는 평소의 내 생각이 틀림없었다고 쾌재를 부르기도 했답니다. 김근태는 투사다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김근태는 괜찮은 남자다라고 말해줘도 조금도 실례가 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그의 글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머지않아 자유의 몸이 될 그 괜찮은 남자에게 이 책의 발간이 이중의 기쁨이 되리라 믿으며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1992년 6월 5일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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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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