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양성희 기자]"김근태 의장이 빨간 오랏줄에 묶여서 법정에 다시 앉아 있는 느낌이다."

영원한 '민주주의자'로 불리는 故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인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3일 오후 서울 고법 형사2부에서 재심 첫 공판을 마친 후 담담하게 말했다. 재심을 받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는 얘기다.

인재근 의원은 김근태 의장의 영원한 동지이자 아내이다. 하지만 김근태 의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2011년 12월31일 새벽 5시31분 세상을 떠났다. 고문 후유증이 악화된 결과다.

세상을 떠나기 전 김근태 의장은 아끼던 딸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한 채 병상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민주화 운동의 대부', '영원한 민주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젊었을 때부터 사랑하는 가족을 잘 챙기지 못해 딸의 결혼식만은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 1985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를 자백하라고 강요받으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했다.

당시 재판부는 1986년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확정 판결 받았다. 그는 유죄를 확정받았지만, 고문 등 강요에 의한 자백이라는 점에서 증거능력에 의문이 이어졌다. 그는 정치에 참여한 뒤 열린우리당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서울 도봉구에서 3선 의원을 역임했다.

김근태 의장은 국민으로부터 여러 차례 선택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과거 고문 사건에 대한 재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이 고문후유증 때문에 향년 6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각계에서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재심 청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이어졌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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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사회]고문 후유증 치유 위한 김근태 기념 센터 '숨' 개관… 고문 피해 구제·지원 법안은 여전히 상임위서 낮잠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조용히 웃 고 있었다. 6월25일 늦은 오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성가소비녀회(수녀원) 성재덕관 건물 입구에서 맞닥뜨린 사진 속 고인의 모습이 그랬다. 평화가 깃든 이곳에 김근태 기념 치 유센터 '숨'이 둥지를 틀었다. 고문 등 국가폭 력 피해자들을 위해 설립된 국내 첫 민간 전 문 치료기관이다. '숨'은 그동안 눌려왔던 이 들의 '숨길'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붙 여진 이름이다. 개소식이 열린 다음날은 유 엔이 선포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이었다.

생전에 고인은 편안히 숨 쉬지 못했다. 가을이 찾아들 때마다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던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 실로 끌려가 22일간의 생지옥을 겪고 나서 부터였다. 2011년 가을이 찾아오자, 어김없이 기력을 잃었다. 생애 마지막 가을이었다.

"사제단은 김근태님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 습니다. 더 싸워라, 앞장서거라. 그런데 그분 이 전기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을 앓고 있다 는 사실을 저희들은 잊었습니다."

피해 당사자 등 십시일반 기금 3억원 마련

2012년 1월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 전 고문의 영결미사를 집전한 함세웅 신부는 고인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더불어 폭압적인 정권으로부터 고문 당한 이들을 위한 치유 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주 의의 밑거름이 된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건 국가의 의무이자, 우리 모두의 의무라는 뜻이었다. 그해 가을, 김 고문의 아내인 인재 근 민주당 의원,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이석태 변호사 등 각계 인사들과 고문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 와 집행위원회를 꾸렸다. 십시일반 3억원가 량의 센터 설립 기금을 마련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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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근태 모란공원에서 영면명동성당서 영결미사 후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제 "그의 고통은 역사의 문신"정치인·시민 1000여명 눈물로 마지막 길 애도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는 700여명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3일 모란공원에 울려 퍼졌다. 하늘도 이승과 작별을 고하는 그의 마지막을 애달파하는 듯 눈발이 거셌다. 정희성 시인은 이날 영결식에서 조시 '그대를 잊지 못하리'를 낭송하며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구나"라고 고인을 영영 떠나 보내는 아픈 마음을 담았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운구 행렬이 3일 오전 노제가 열린 서울 청계천 전태일다리로 들어서고 있다. 오른쪽에 전태일 동상이 보인다. 조영호기자 youcho@hk.co.kr

김근태 고문은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날 오후 1시40분쯤 하관식이 진행되자 내내 차분해 보이던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씨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꼈다.

고인과 고교ㆍ대학 친구로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도 울음을 터뜨렸다. 홀로 맑게 웃고 있는 고인의 영정 사진 앞에는 십자가에 박힌 예수의 상이 놓여져 그가 살아온 천로역정을 말해주는 듯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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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일대기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빌던" 끔찍한 고문 고발하고 '세계의 양심수'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논쟁", 국민연금 주식투자 막아내

이 땅의 민주화가 한두명의 피땀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역사에 김근태라는 이름은 가장 굵은 활자로 아로 새겨질 것이다. 김근태(1947~2011)는 암흑의 시기였던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었다. 온몸으로 역사를 진보시킨 진정한 투사였다.

 그를 운동가로 만든 것은 박정희 독재체제가 낳은 암울한 시대상황이었다. 서울대 상대(경제학과) 3학년 때인 1967년 김근태는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저항의 길을 걸었다. 70년 복학한 뒤에는 동기생인 고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손학규 등과 함께 교련반대(1971) 등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71년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수배받는 처지가 돼,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1979년 말까지 쫓겨 다녔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선다. 당시 우리 사회는 1980년 5·18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에 눌려 학생운동도 움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민주화의 길'이란 소식지 발간과 각종 집회를 통해 민주화 투쟁의 불길을 당겼다. 그 중심에는 초대 및 2대 민청련 의장을 맡은 김근태가 있었다.

김근태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그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곧바로 끌고갔다. 이때부터 김근태를 서울대 학생운동권 조직인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와 그 투쟁문건이었던 '깃발'의 지도자인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만들기 위한 권력 차원의 조작이 시작됐다. 김근태는 9월25일까지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모두 10차례나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문기술자를 돕던 사람조차 김근태가 홀로 남았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고 울먹일 정도였다.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 김병곤 등도 함께 고문을 당했다. 이을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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