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12월30일은 김근태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는 날이다. 그가 떠난 뒤 지인과 후배들은 '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을 그에게 바쳤다. 그러나 김근태의 마지막 당부였던 '2012년을 점령하라!'에는 실패했다. 점령에 실패한 결과는 섬뜩할 지경이다. 서민의 삶은 피폐해지고, 인권과 민주주의는 갈수록 휘청거리고, 근거도 비전도 없는 정책들이 난발하고, 정치는 희망은커녕 절망을 안기고 있다. 힘들고 안타까울수록 김근태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김근태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바보 같은 김근태는 역시나 자기반성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가 처한 암담한 현실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민주정권 10년에 있다. 기적처럼 탄생했고 10년을 책임졌지만 역사의 방향을 바꾸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 외환위기라는 불리한 여건에서 시작했지만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기에 변명이나 위로가 될 수 없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성장 패러다임에 묶여 재벌과 타협하고, 사대화된 관료들에게 포섭된 채 신자유주의를 무방비 상태에서 수용하고 말았다. 민주정부 10년의 오류가 빈사상태의 한나라당을 살려내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촉매자가 되는 역설을 만들어 냈음을 인정해야 한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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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서울=연합뉴스) '민청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 28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2부(김용빈 부장판사)는 2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1986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김 전 의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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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문과 불법감금을 당했던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에 대한 재심선고가 오는 29일 이뤄진다.

1일 서울고법 형사2부(김용빈 부장판사)는 김 전 의원에 대한 국가보안법·집시법위반 등 재심사건에 대한 재판을 마무리하고 5월 29일 오전 10시에 판결을 선고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날 백지구형했다. 검찰은 최후진술에 앞서 "2011년 운명을 달리하신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러나 "고 김 전 의원이 경찰의 고문으로 받은 자백은 유죄의 증거로 사용되지 않았고, 김 의원은 검찰조사과정에서 일체의 진술을 하지 않아 검찰이 증거로 낸 것이 없었다"며 "재판부는 경찰과 검찰에서의 진술조서를 제외한 나머지 증거만으로 유죄판결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검찰은 다만 무죄구형 대신 "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달라"며 백지구형을 했다.

이날 최후진술은 부인 인재근 민주당 의원(61)이 고인을 대신했다. 인 의원은 "결심공판을 앞두고 밤새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이어 "28년 전 김근태가 했던 최후진술을 읽었다"면서 "내가 아는 김근태가 최후진술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고 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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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양성희 기자]"김근태 의장이 빨간 오랏줄에 묶여서 법정에 다시 앉아 있는 느낌이다."

영원한 '민주주의자'로 불리는 故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인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3일 오후 서울 고법 형사2부에서 재심 첫 공판을 마친 후 담담하게 말했다. 재심을 받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는 얘기다.

인재근 의원은 김근태 의장의 영원한 동지이자 아내이다. 하지만 김근태 의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2011년 12월31일 새벽 5시31분 세상을 떠났다. 고문 후유증이 악화된 결과다.

세상을 떠나기 전 김근태 의장은 아끼던 딸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한 채 병상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민주화 운동의 대부', '영원한 민주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젊었을 때부터 사랑하는 가족을 잘 챙기지 못해 딸의 결혼식만은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 1985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를 자백하라고 강요받으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했다.

당시 재판부는 1986년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확정 판결 받았다. 그는 유죄를 확정받았지만, 고문 등 강요에 의한 자백이라는 점에서 증거능력에 의문이 이어졌다. 그는 정치에 참여한 뒤 열린우리당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서울 도봉구에서 3선 의원을 역임했다.

김근태 의장은 국민으로부터 여러 차례 선택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과거 고문 사건에 대한 재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이 고문후유증 때문에 향년 6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각계에서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재심 청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이어졌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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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사회]고문 후유증 치유 위한 김근태 기념 센터 '숨' 개관… 고문 피해 구제·지원 법안은 여전히 상임위서 낮잠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조용히 웃 고 있었다. 6월25일 늦은 오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성가소비녀회(수녀원) 성재덕관 건물 입구에서 맞닥뜨린 사진 속 고인의 모습이 그랬다. 평화가 깃든 이곳에 김근태 기념 치 유센터 '숨'이 둥지를 틀었다. 고문 등 국가폭 력 피해자들을 위해 설립된 국내 첫 민간 전 문 치료기관이다. '숨'은 그동안 눌려왔던 이 들의 '숨길'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붙 여진 이름이다. 개소식이 열린 다음날은 유 엔이 선포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이었다.

생전에 고인은 편안히 숨 쉬지 못했다. 가을이 찾아들 때마다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던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 실로 끌려가 22일간의 생지옥을 겪고 나서 부터였다. 2011년 가을이 찾아오자, 어김없이 기력을 잃었다. 생애 마지막 가을이었다.

"사제단은 김근태님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 습니다. 더 싸워라, 앞장서거라. 그런데 그분 이 전기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을 앓고 있다 는 사실을 저희들은 잊었습니다."

피해 당사자 등 십시일반 기금 3억원 마련

2012년 1월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 전 고문의 영결미사를 집전한 함세웅 신부는 고인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더불어 폭압적인 정권으로부터 고문 당한 이들을 위한 치유 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주 의의 밑거름이 된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건 국가의 의무이자, 우리 모두의 의무라는 뜻이었다. 그해 가을, 김 고문의 아내인 인재 근 민주당 의원,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이석태 변호사 등 각계 인사들과 고문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 와 집행위원회를 꾸렸다. 십시일반 3억원가 량의 센터 설립 기금을 마련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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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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