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사회]고문 후유증 치유 위한 김근태 기념 센터 '숨' 개관… 고문 피해 구제·지원 법안은 여전히 상임위서 낮잠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조용히 웃 고 있었다. 6월25일 늦은 오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성가소비녀회(수녀원) 성재덕관 건물 입구에서 맞닥뜨린 사진 속 고인의 모습이 그랬다. 평화가 깃든 이곳에 김근태 기념 치 유센터 '숨'이 둥지를 틀었다. 고문 등 국가폭 력 피해자들을 위해 설립된 국내 첫 민간 전 문 치료기관이다. '숨'은 그동안 눌려왔던 이 들의 '숨길'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붙 여진 이름이다. 개소식이 열린 다음날은 유 엔이 선포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이었다.

생전에 고인은 편안히 숨 쉬지 못했다. 가을이 찾아들 때마다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던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 실로 끌려가 22일간의 생지옥을 겪고 나서 부터였다. 2011년 가을이 찾아오자, 어김없이 기력을 잃었다. 생애 마지막 가을이었다.

"사제단은 김근태님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 습니다. 더 싸워라, 앞장서거라. 그런데 그분 이 전기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을 앓고 있다 는 사실을 저희들은 잊었습니다."

피해 당사자 등 십시일반 기금 3억원 마련

2012년 1월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 전 고문의 영결미사를 집전한 함세웅 신부는 고인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더불어 폭압적인 정권으로부터 고문 당한 이들을 위한 치유 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주 의의 밑거름이 된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건 국가의 의무이자, 우리 모두의 의무라는 뜻이었다. 그해 가을, 김 고문의 아내인 인재 근 민주당 의원,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이석태 변호사 등 각계 인사들과 고문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 와 집행위원회를 꾸렸다. 십시일반 3억원가 량의 센터 설립 기금을 마련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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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근태 모란공원에서 영면명동성당서 영결미사 후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제 "그의 고통은 역사의 문신"정치인·시민 1000여명 눈물로 마지막 길 애도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는 700여명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3일 모란공원에 울려 퍼졌다. 하늘도 이승과 작별을 고하는 그의 마지막을 애달파하는 듯 눈발이 거셌다. 정희성 시인은 이날 영결식에서 조시 '그대를 잊지 못하리'를 낭송하며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구나"라고 고인을 영영 떠나 보내는 아픈 마음을 담았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운구 행렬이 3일 오전 노제가 열린 서울 청계천 전태일다리로 들어서고 있다. 오른쪽에 전태일 동상이 보인다. 조영호기자 youcho@hk.co.kr

김근태 고문은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날 오후 1시40분쯤 하관식이 진행되자 내내 차분해 보이던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씨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꼈다.

고인과 고교ㆍ대학 친구로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도 울음을 터뜨렸다. 홀로 맑게 웃고 있는 고인의 영정 사진 앞에는 십자가에 박힌 예수의 상이 놓여져 그가 살아온 천로역정을 말해주는 듯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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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일대기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빌던" 끔찍한 고문 고발하고 '세계의 양심수'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논쟁", 국민연금 주식투자 막아내

이 땅의 민주화가 한두명의 피땀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역사에 김근태라는 이름은 가장 굵은 활자로 아로 새겨질 것이다. 김근태(1947~2011)는 암흑의 시기였던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었다. 온몸으로 역사를 진보시킨 진정한 투사였다.

 그를 운동가로 만든 것은 박정희 독재체제가 낳은 암울한 시대상황이었다. 서울대 상대(경제학과) 3학년 때인 1967년 김근태는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저항의 길을 걸었다. 70년 복학한 뒤에는 동기생인 고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손학규 등과 함께 교련반대(1971) 등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71년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수배받는 처지가 돼,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1979년 말까지 쫓겨 다녔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선다. 당시 우리 사회는 1980년 5·18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에 눌려 학생운동도 움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민주화의 길'이란 소식지 발간과 각종 집회를 통해 민주화 투쟁의 불길을 당겼다. 그 중심에는 초대 및 2대 민청련 의장을 맡은 김근태가 있었다.

김근태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그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곧바로 끌고갔다. 이때부터 김근태를 서울대 학생운동권 조직인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와 그 투쟁문건이었던 '깃발'의 지도자인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만들기 위한 권력 차원의 조작이 시작됐다. 김근태는 9월25일까지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모두 10차례나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문기술자를 돕던 사람조차 김근태가 홀로 남았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고 울먹일 정도였다.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 김병곤 등도 함께 고문을 당했다. 이을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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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민주대연합 이뤄야 정권교체 보인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민주당 김근태 진보개혁모임 대표
한겨레 성한용 기자기자블로그 이정우 기자기자블로그
» 김근태 진보개혁모임 공동대표는 인터뷰 내내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범야권의 단일정당 통합 가능성에 대해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의 고비마다 기적은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2008년 6월 촛불 국면에서 아고라 누리꾼들이 토론 내용을 책으로 엮은 일이 있다. 책 서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한국 민주주의에 절망하던 날, 아니 김근태가 신지호에게 패하던 날, 세상인지 역사인지로부터 받은 타격을 견딜 수 없었다.”


‘김근태’는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다. 그가 뉴라이트 계열 자유주의연대 대표를 지낸 신지호 의원에게 18대 총선에서 패배한 것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정치적 패퇴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런 그가 3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정치활동에 나섰다. 지난 3월8일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결성하고 공동대표를 맡은 것이다. 그동안 이명박 정권은 반환점을 훌쩍 넘어섰다. ‘업적’과 ‘돈’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을 그렇게도 열렬히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이제 태도를 바꾸고 있다.


김근태 공동대표를 만나 진보와 개혁, 복지, 야권 통합과 연합, 내년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 등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김근태 대표는 정치인답지 않게 지나치게 사변적 언어를 구사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얘기는 경청할 가치가 있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반도 재단’ 사무실에서 3시간 동안 했다.


인터뷰/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그동안 정치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하면서 지냈나?

“운동을 많이 했다.”


-민주화운동 말인가?

“(웃음) 아니고. 일주일에 사나흘은 동네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고, 나머지 사나흘은 집 근처 초안산에 오르내렸다.”


-공부도 꽤 했을 것 같은데?

“2008년 미국에서 출발한 전세계적 금융위기로 우리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어떻게 봐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공부를 좀 했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왜 낙선했다고 생각하나?

“직접적으로는 뉴타운 돌풍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 보상을 더이상 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둘째, 민주화 세력이 아파트 분양 원가나 국민연금 등 민생문제에서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데 대해 국민들이 책임을 물은 것이다. 아무튼 낙선은 국민의 명령이었다. 그래서 자숙하고 자성했다.”

 

브라질 룰라처럼 정파 독자성 유지하며 통합
야권정당·시민단체·노동자 등 원탁회의 필요
연합공천 난망…지분협상 통한 통합이 살길


-국민들이 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선택했을까?

“역시 민생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했고, 일자리 부족은 여전했다. 중산층과 서민의 박탈감이 커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미국 중심의 시장만능주의가 밀고 들어왔지만, 워싱턴 컨센서스가 뭔지도 제대로 파악을 못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는데, 그런 표현은 항복 선언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집결시키지도 못했다. 아이엠에프의 강제와 재벌 연구소의 대안적 방향이나 참고하면서 난파했다. 반면에 특권세력은 이런 상황을 활용해 동맹을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뉴라이트의 발호가 그 증거였다. 슬로건과 담론 투쟁에서도 우리는 패배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가 국민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동안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는 이명박 정권이 패배했다. 이유가 뭘까?

“지표경제는 괜찮다고 하지만, 체감경기는 너무나 심각하다. 못 견디겠다고 반발하면 정권은 탄압을 했다. 그 과정에서 공권력을 사유화했다. 민주주의가 이렇게 후퇴할 것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정권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 것이다.”


-지역구에서 유권자들과 늘 접촉하는데 내년에 정권 탈환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교체를 못 한다면 가히 재난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양김의 분열로, 재야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탄생하고 국민들은 낙담했다.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그에 버금가는 상황이 올 것으로 본다.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범야권 세력은 역사적인 규탄을 받을 것이다.”


-범야권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절박한 민생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방향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전망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통합과 연합으로 한나라당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면 수도권과 부산·경남에서 한나라당을 패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담론과 슬로건 투쟁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담론과 슬로건이라면?

“경제의 인간화라고 할까,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정책을 도입하자는 것인데, 뭐라고 할지는 좀더 고민해야 한다.”


-진보개혁모임 결성을 주도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모임을 왜 만들었나?

“한마디로 정권교체 위해 의미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활동하고 있나?

“매주 목요일 점심에 모여서 정세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다. 또 한 달에 한 번은 포럼을 하기로 했다. 거대 담론도 필요하겠지만, 구체적 사안에 집중하기로 했다. 5월에는 최저임금을 다루기로 했다. 주택담보 부채 문제는 6월에 다루기로 했다.”


-모임 이름을 왜 진보개혁으로 했나?

“우리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작은 정당이지만 정당 활동을 하고 있다.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덜 진보적이다. 일종의 개혁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의 대통합에 다리가 됐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진보개혁모임이라고 했다.”


-모임에는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있다. 그러나 민주·진보세력이 대통합을 이뤄야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분들이다.”


-민주와 진보는 좀 다른 것 아닌가?

“어려운 질문이다. 진보의 문제가 발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세계에서 미국·영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가 관철되고 있다. 1%의 사람들이 세계 재산의 43%를 갖고 있다. 10%가 83%를 갖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서 이렇게 불평등하게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절박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진보적 정책과 대안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진보가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고 보나?

“과거 반독재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학생, 노동자, 농민들이 진보적 목소리를 많이 냈다. 의미는 있었지만 바로 실현할 수는 없었다. 나는 민주대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고 그다음에 진보로 가자고 했다. 잘 알다시피 정권교체는 했지만 그다음으로 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진보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됐다.”


-진보가 중요하면 진보정당을 강화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진보세력 일부에서는 개혁주의 세력을 빼고 가자는 주장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1987년 1차 민주대연합에 이어, 최근 상황을 2차 민주대연합으로 규정하고 싶다. 진보와 개혁주의 세력이 타협해서 함께 손잡고 가야 정권교체를 이루고 다수당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복지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복지는 시장경제 시스템의 보완적 의미가 강한데, 지금 시대정신이 복지인가?

“시장경제는 불공정성과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강자와 약자가 경쟁 전부터 구별된다. 어떤 경제제도를 택하면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보장하는 적극적 의미의 복지를 말하는 것인가?

“그건 복지가 아니라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나는 주장한다.”


-진보개혁모임 창립선언문에는 그런 내용은 없다.

“공부를 더 해야 하는 부분이다. 아직 판을 제대로 못 벌였다. 지금도 시장경제가 마치 공정하고 자동으로 조절하는 기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에 반대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시장에 대해 말하자면, 유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갖추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펴는 ‘덴마크 모델’을 검토해볼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편적 복지가 가능한 분야는 어디일까?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기초노령연금인데, 지금의 8만7000원에서 15만원 정도로 인상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한나라당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던 ‘반값 등록금’이다. 재원 확보를 둘러싸고 구체적인 논쟁을 벌였으면 좋겠다.”


-보편적 복지를 위한 증세에 찬성하는지?

“증세는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순서나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토론과 타협의 과정 없이 증세는 불가능하다.”


-민주당과 통합 문제로 넘어가자. 손학규 대표가 잘하고 있다고 보나?

“지금은 누가 대표를 해도 거기서 거기일 것 같다. 지금 민주당 지지율은 반사이득이다. 민주당은 아직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분당을에 출마했는데?

“이겼으면 좋겠다. 그래야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이 지금처럼 이명박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범야권 통합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브라질의 룰라가 12개 정파를 등록시켜 각 정파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통합을 이뤄냈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다. 민주당, 진보정당, 국민참여당 등 범야권 정당과 시민사회, 대중단체 조직, 노동자와 농민 조직이 참여하는 원탁 테이블을 구성하는 게 필요하다. 4·27 재보선이 끝나면 본격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통합이 안 되면 각 정당이 선거연대를 해야 하나?

“후보조정, 연합공천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지분협상을 통해 통합을 반드시 해야 한다. 통합만이 살길이다.”
 

-통합의 시한은?

“12월 중순까지는 통합전당대회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 방향이나 슬로건, 담론을 정하고, 200개가 넘는 지역구 후보 공천과 비례대표 공천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들은 국회의원 선거를 내년 4월로 생각한다. 시간표에 어긋남이 있다. 걱정이다.”

 

“박근혜 전대표가 대통령 안됐으면 좋겠다”
정치인으론 괜찮지만 국가지도자론 부적격
‘경제의 인간화’에 맞춰 민생 구체대안 찾을것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를 어떻게 생각하나? 진정성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꽤 평가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가 (대통령이) 안 됐으면 좋겠다. 지난 대선 때 ‘줄푸세’(줄이고, 풀고, 세우고)는 대표적인 시장만능주의 공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복지를 얘기한다. 일관성이 없고 설명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체계적인 철학과 비전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사학법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그가 반대할 때 보니까 정서와 마인드가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더라. 정치인으로서는 괜찮은 사람일 수 있지만, 국가 지도자로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김근태 공동대표는 인터넷 홈페이지 ‘김근태가 살아온 길’에 아래와 같은 글을 띄워 놓았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김근태가 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이다. 오래전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지만, 지금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 듯해 여기에 인용한다.


“1970년대 어느 추운 겨울날, 저는 수배자로서 길가의 갈대밭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어쩐지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이 슬며시 먹빛으로 변하고, 먹빛 하늘이 청동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적 같았습니다. 결국 저에게 아침은 왔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죽도록 몸살을 앓았지만, 저는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리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 김근태는

 

노무현 전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

김근태 진보개혁모임 공동대표의 일생은 제1막 박정희·전두환 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 시기’, 제2막 정권교체에 합류하고 장관과 집권당 의장을 지낸 ‘정치인 시기’까지 전개되어 있다. 제3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1947년생이니까 만으로 예순네살이다.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경기도 양평 양수초등학교, 서울 광신중학교를 나왔다.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생들이 들어가던 경기고를 나왔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고교 동기동창이다. 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67년 육군 보병으로 입대해 70년 병장으로 제대했다. 서울대 졸업 1년을 앞두고 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됐으며, 74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됐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2대 의장을 맡았고, 그 때문에 85년부터 88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두 10차례의 전기고문·물고문을 받았는데,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폭로해 국내외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고,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은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90~92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으로 다시 구속됐다.


95년에는 오랜 재야생활을 접고 민주당에 입당해 부총재를 맡아 정치를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국민회의에 합류했고, 96년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했다. 2002년에는 대통령 선거 당내경선에 나섰다가 중도하차하고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를 둘러싸고 노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는데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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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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