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②] 민청련 창립총회 성공하다

 

17.08.03 10:50l최종 업데이트 17.08.03 10:50l 글: 민청련동지회(demoyouth) 편집: 박정훈(twentyrock)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기자 말. 

긴박했던 상지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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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9월 30일 저녁, 서울 성북구 돈암동 상지회관은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저녁 8시쯤 되자, 밖에서 웅성대는 사람이 1백 명 가까이 늘어났고, 항의도 거세어졌다. 경찰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연행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경찰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문 앞에서 항의하는 사람부터 강제 연행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0~40명이 붙들렸고 경찰차에 실려서 성북경찰서로 이동됐다.

한편 연행을 피해 상지회관 진입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 남편 박강희와 함께 광화문에서 논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하고 있던 백완승씨가 그런 경우였다. 그해 3월에 결혼해 임신 6개월이었는데, 남다르게 배가 많이 부른 상태였다. 경찰이 "어디에 가느냐?"고 묻자 태연하게 "저기 친구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자 경찰도 설마 만삭의 부인이 집회에 참석하러 간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통과시켜주었다. 그녀는 진을 치고 있던 경찰 기동대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걸어서 회관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중략)

 

김근태 의장은 누구인가

의장으로 선출된 김근태 의장이 등단하여 인사말을 하였다. 김근태 의장은 워낙 오랫동안 수배생활을 한 탓에 이날 처음으로 김 의장을 본 회원들도 많았다.

지하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노련한 민중운동가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김 의장은 하얀 피부에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운동가라기보다는 대학교수처럼 보였다. 김 의장은 특유의 온화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당면 정세를 설명하고, 민청련이 수행해야 할 당면 과제를 차근차근 설명해갔다. 김근태 의장은 또 예견되는 시련과 박해에 맞서 모두 힘을 합쳐 싸워나갈 것을 부탁하였다. 회원들은 경찰에 포위되어 있는 삼엄한 상황도 잊은 듯, 김 의장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장영달 부의장도 힘찬 취임인사를 간결하게 끝냈다. 그리고 회원들 모두 한 사람씩 자기 소개와 함께 집행부에 대한 격려와 당부의 말이 이어졌다.

밤 11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창립대회는 만세삼창을 끝으로 무사히 끝났다. 어떻게든 총회를 성사시키겠다는 일념하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이 행사를 준비했던 집행부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험난한 앞길이 놓여 있었지만 일단 민청련이라는 배를 바다에 띄어놓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행사가 끝나자 경찰과의 약속대로 김근태 의장을 비롯하여 장영달, 연성만 등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찰차를 타고 남산 안기부로 향했다. 배웅하는 회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걱정말라고 웃으며 떠났지만 보내는 회원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경찰들도 원래 약속대로 다른 회원들은 연행하지 않고 골목 양쪽에 도열한 채 총총히 골목길을 내려가는 회원들을 지켜보았다. 창립과 동시에 집행부를 경찰의 손에 넘겨준 회원들은 돈암동 근처 술집들로 흩어져 소줏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달랬다.

 안기부 5국이 사용하던 남산 기슭에 있는 4층 건물. 지하에 민주인사들을 취조하던 조사실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안기부 5국이 사용하던 남산 기슭에 있는 4층 건물. 지하에 민주인사들을 취조하던 조사실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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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부 전원이 안기부로 끌려가다

상지회관에서 연행된 김근태 의장, 장영달 부의장, 연성만 사회부 차장은 곧바로 남산에 있는 안기부 5국 지하 조사실로 이송되었다.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었던 박계동 홍보부장, 박우섭 총무부장도 이송되어 왔다. 이들은 각 조사실로 한 명씩 분산수용되어 강도 높은 밤샘 조사를 받았다. 민청련의 창립 경위와 목적, 배후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관련자가 누군지에 대해 집중조사를 받았다.

대회 전에 집행부 내정자들은 김근태 의장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전원 구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래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조직을 살리기 위해서 경찰 조사과정에서는 모든 일의 기획과 문건 작성 등 책임을 김근태 의장이 떠맡는 것으로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 설사 김 의장이 구속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이 나와서 조직을 끌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연행된 간부들은 조사과정에서 원래 각본대로 김 의장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으로 진술했다.

장영달이 구타당한 이유

그런데 장영달 부의장이 한 가지를 자신이 했다고 진술해서 파란이 일었다. 발기문을 자신이 썼다고 주장한 것이다. 발기문 말미에 '발기인 대표 장영달'이라고 명기되어 있는데,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문건을 김 의장이 썼다고 차마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조사관들 사이에 혼선이 일어났다. 김근태 담당조사관은 김근태가 썼다고 하고, 장영달 담당조사관은 장영달이 썼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두 사람이 대질하여 해결되었다.

대질하는 자리에서 김 의장이 본인이 쓴 것으로 장 부의장을 '설득'하여 김 의장이 쓴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바람에 장영달 부의장은 체면이 크게 깎인 담당조사관으로부터 주먹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안기부에는 현장에서 연행된 집행부 이외에 이미 붙잡혀온 연행자들도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 무렵,  낌새를 챈 안기부는 운동권 인사들의 출입이 잦은, 종로 5가에 있던 공해문제연구소를 급습했다. 이때 소장 최열과 정문화 그리고 우연히 그곳에 들렸던 중앙대 출신 학생운동가 이석표까지 연행되어 와 있었다.

그리고 사회부장으로 내정했으나 총회 당일 날은 발표하지 않고 2선으로 남겨 두었던 연성수도 연행되어 왔다. 당일 날은 연행을 면했으나 이틀 뒤에 피신해 있던 아내 이기연의 화실에서 안기부 수사관에게 체포된 것이다.

 1984년 시위현장에서 경찰에게 둘러싸여 끌려가는 연성수 사회부장
 1984년 시위현장에서 경찰에게 둘러싸여 끌려가는 연성수 사회부장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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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의장, 각서를 거부하고 석방되다

집행부의 작전이 적중했는지, 아니면 애초 구속할 방침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연행한 지 3일째 되는 날, 김근태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석방되기 직전에 간부들은 민청련 활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 부분에 대해 사전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원래 김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은 일단 나와서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기 때문에 각서를 써주고 나왔다.

안기부 측은 김근태 의장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했다. 나가면 민청련을 해체하고 활동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김 의장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도장을 찍고 나가서 민주화운동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우리가 눈감아 주겠다. 그러나 거부하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성 제안을 했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은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민청련을 해체하라는 건데, 해체는 의장이 할 수 없는 거다. 회원들이 해체해야지, 말이 안 되는 걸 내가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 버텼다.

조직 원칙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공개단체의 장으로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보고 끝까지 거부한 것이다. 결국 일주일 남짓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 계속되다가 안기부는 결국 김 의장을 석방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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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①] 민청련 창립되던 날

 

17.07.25 15:18l최종 업데이트 17.07.25 15:18l 글: 민청련동지회(demoyouth) 편집: 박정훈(twentyrock)

 

연재를 시작하며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민청련이 창립되던 날 - 민주의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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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에서 만찬 도중 박정희를 저격하여 숨지게 함으로써 길었던 18년 유신체제가 무너졌다. 우리가 맞이한 1980년 봄은 바로 무너진 그 자리에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를 놓고 부푼 기대와 젊음의 열정이 들끓었던 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냉혹한 군사독재로 얼어붙었던 동토에 민주주의의 새잎이 돋아나 온통 푸른 봄의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던 김재규는 곧바로 반란 수괴로 감옥에 갇혔고, 박정희의 후예 신군부 소장파 장교들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앞서 11월 24일에 민주화운동 세력은 유신체제에서와 같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를 열었다가 계엄사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대회는 무산됐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서울의 봄'이 오는 것은 자연순환의 이치처럼 자명한 것으로 믿었다.

1980년 3월 6일, 잔설이 남아 있는 초봄, 육군형무소에서 김재규의 비서실장 박흥주 대령이 총살로 처형됐다. 그래도 우리는 봄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5월 15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온 대학생 5만여 명이 서울역 광장에서 계엄해제를 외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을 때 "봄은 바로 옆, 문밖까지 와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와 재야 지도자들도, 정치의 봄이 오고 있다고, 그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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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봄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민주주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서울의 봄'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신군부의 독재에 저항한 광주 시민 수백 명이 광주항쟁 과정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되었고, 그 기간 중에 김재규와 그의 부하 4명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시 이 땅은 유신독재의 후예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긴 독재의 겨울이 왔다.

그러나 기나긴 유신독재가 막을 내린 후에 우리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던 '서울의 봄'은 단지 한바탕 꿈은 아니었다. 지리산 철쭉꽃이 피어나는 5월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우리 가슴 속에 '서울의 봄'은 다시 생생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꿈이었고, 만주에서 굶주림 속에 조국해방의 일념으로 일제와 싸웠던 독립용사들의 꿈이었다.

무명 순국열사묘역에서 결의를 다지다

광주항쟁이 좌절된 지 3년여의 세월이 지난 1983년 9월 29일 아침. 수유리 4·19묘지 뒷산 순국열사묘역에 있는 독립군 무명용사묘 앞에 일군의 청년들이 모였다. 바로 다음 날인 30일에 있을 민청련 창립대회를 앞두고 민청련 집행부가 될 내정자들이었다.

 수유리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안내판
 수유리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안내판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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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상한 학자풍 얼굴의 김근태 의장 내정자를 비롯해, 뿔테 안경에 장발의 투사형 장영달 부의장 내정자, 이마가 넓은 미남형 박계동 홍보부장 내정자, 다부진 체구에 걸음이 빠른 박우섭 총무부장 내정자, 준수한 외모에 귀공자 타입의 홍성엽 재정부장 내정자, 순발력 있고 재치가 많은 연성수 사회부장 내정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묘는 연성수가 아침 운동으로 백련사 길을 올라다니면서 발견한 장소인데, 창립 전날 결의를 다지기 좋은 장소라 생각하여 제안했던 것이다. 맨몸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할 민청련의 출범을 앞두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 앞에서 출정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 창립대회를 무사히 치르게 해주십사 기원을 담은 고천(告天) 의식이기도 했다.

연성수가 사회를 봤다. 먼저 독립운동에 몸 바친 순국열사들에 대한 묵념을 했다. 이어서 김근태 의장 내정자가 술을 한잔 올리고 제문을 읽었다.

"유세차 1983년 9월 29일에 천지신명과 독립용사들의 영전에 고하나니..."

김근태 의장 내정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북한산의 맑은 가을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천지신명과 무명 독립용사들의 영혼이 출범하는 민청련을 돌봐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는 제문이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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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26일 경기 모란공원의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26일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묘역을 참배하고 “‘평화가 밥이다. 평화가 경제다’라는 김 고문과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와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정부 당국과 협의해 개성공단을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 원내대표는 이날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위치한 김 고문의 묘역에서 추도사를 통해 “평화와 경제 초석을 다질 것”이라며 “민주주의와 평화만이 한계상황 몰린 서민과 ‘을(乙)’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기제”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 계신 김 고문과 민주열사들, 봉하의 노무현 전 대통령, 동작동의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촛불 여망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흐르는 정신이 있다”며 “그것은 민생, 민주주의와 평화”라고 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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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미소 띠고 김근태 고문한 전두환의 하수인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4> 6월항쟁, 여섯 번째 마당
김덕련 전 기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고문 위에 세워진 박정희·전두환 정권 

프레시안 : 1985년 김근태가 고문 실상을 폭로했다. 정권 차원에서 고문을 밥 먹듯이 자행한 탓에 그 피해자가 무척 많았는데, 그 가운데 김근태의 경우 자신이 당한 고문의 전모를 낱낱이 드러내 주목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더 나아가 극우 반공 체제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고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먼저 전두환 정권은 왜 김근태를 그토록 심하게 고문한 것인가.

서중석 : 박정희 유신 정권이나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고문 위에 세워진 군인 파시즘 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유신 정권 시기에도 그렇고 1980년대에도 무수히 많은 고문 사건이 있었다. 김근태뿐만 아니라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간부 이을호 등 여러 사람이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것 때문에 이을호는 정신적으로 질병을 앓기도 했다. 또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관계자들, 그리고 이른바 용공 좌경 사건에 엮인 수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심한 고문을 당했다.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김근태 고문 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살펴보자.
 

(후략)

 

원문보기=>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7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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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 전 경감. 고문 등 혐의로 수배를 받은 이 전 경감은 10년간 도피 생활을 하다 1999년 자수했고, 이듬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특히 1999년 법정에 선 이 전 경감은 1985년 고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 의장)을 고문한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발가락에 전선을 묶어 전기 고문을 진행했다고 밝혔는데요.(후략)

(전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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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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