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김근태가 후배 정치인들에게 남긴 유훈은…

투사는 많다.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에도 많을뿐더러 119에 전화를 걸어 비상근무자에게 "나는 경기도지사요. 이름이 누구요?"라고 따져 물은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비롯해 한나라당에도 수두룩하다.

그들의 현재가 어떻든 간에,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군사독재와 싸운 이들은 존중 받아야 한다. 하지만 독재가 무너진 후 그들 중 다수는, 그들이 받아 마땅한 존중을 스스로 걷어차버렸다. 한나라당에 몸 담고 있는 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정치란 게 말이지~"를 입에 달고 다니던 이들이 많다.

부동산 값이 들썩거리는 것을 "이제 경기가 풀린다"고 해석하던 사람들, 특목고를 풀거나 대학 등록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게 해놓고선 "교육경영마인드가 필요하다"던 사람들, 한미FTA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짓밟으며 "쇄국정책 하자는 말이냐"고 눈에 쌍심지를 켜던 사람들, "조중동에서 중앙은 빼야지"라던 사람들이 그렇단 말이다. 이들 중 또 상당수는 이제 "다른 말 필요없다. 反이명박이 이 시대의 진보다. 우리가 다시 집권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여당 잘하기에 비하면 야당 잘하긴 너무 쉽다.

그래서 김근태의 빈 자리가 크다. 김근태의 아픔이 더 아프다. 김근태는 여당 잘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더 고민하고 노력했고 부딪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당 정치인 김근태는...

▲ 2006년 열린우리당 당권에 도전하던 시절의 김근태ⓒ프레시안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김근태는 뜬금없는 양심선언을 했다. "2년 전 최고위원 경선 때 실세인 권노갑 씨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었다"는 것이었다.

한 때는 너나없이 권노갑 돈 마다치 않았던 대선 주자들 모두가 동교동과 차별화를 시도할 때 나온 바보스런 고백이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자"는 김근태의 제안에 대해선 반응이 없었다.

"혼자 깨끗한 척한다", "바보"라는 비아냥이 동료 의원들에게서 나왔을 뿐이다.

탄핵열풍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획득한 2004년 총선 후 노무현 대통령이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개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대통령의 소신이다"이라며 "장사하는 것인데 10배 남는 장사도 있다"면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라는 열린우리당 총선 공약을 부인하자 김근태 '의장'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해보자"고 결기를 세웠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모른 척 했고 김근태의 운동권 후배였던 다른 여당 의원이 "나같이 밑에 있는 사람과 토론하자"고 치받았다.

원내대표 시절 김근태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지만 역시 또 운동권 후배들이 "청와대와 정부가 정했는데 당론으로 밀어야 한다"고 그를 흔들었다. 김근태를 흔들던 이 중 일부가 국회 표결 때는 '개인 소신'이라며 자기는 반대표를 던진 것, 그리고 지금은 진보정당에 가 있는 건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처음으로 당권을 쥔 김근태는 사회적 대타협을 내걸고 전경련, 민주노총 등을 연달아 방문하며 '뉴딜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때도 '누구 마음대로 그런 약속을 하냐'는 싸늘한 반응은 여권에서 나왔다.

지금 민주통합당 대표 경선에 나섰던 이들 중 상당수가 청와대와 보조를 맞췄던 한미FTA, 김근태 '의원'은 그때도 "나를 밟고 가라"고 맞섰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다. 여당 정치인 김근태는 항상 "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했지만 "세상 모르는구만" 내지 "역시 김근태는 안 된다니까"라는 소리는 그의 동지들에게서 나왔다.

몇 안 되지만 소중한 성공의 기록도

'여당 정치인'김근태가 '반대의 기록'만 남기고 항상 실패만 한 것은 아니다. 김근태가 제 몸을 밀어넣어도 신자유주의의 바퀴는 대체로 굴러갔지만, 때론 멈춘 적도 있다.

대통령부터가 "감전된 것 같다"고 극찬하고 정부와 여야 정치권의 '묻지마 지원'이 이어지던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신중론을 펼쳤던 몇 안되는 고위 인사가 '김근태 장관'과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이었다. 김근태는 이후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나는 진실이 국익에 우선한다고 이야기 했다가 네티즌들에게 몰매를 맞았다"고 회고했다.

김병준, 황우석, 노성일(미즈메디 병원 원장), 이상호(우리들 병원 원장) 등 노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인사들이 포진한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에서 영리병원 도입의 저지선 역할을 했던 것도 '김근태 장관'이었다.

김근태가 앞장서 2007년 개정된 지방세법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과 강남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과된 법이었다. 공동과세를 통해 강남의 세수를 강북에 지원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서울시에 소득재분배 기능을 도입한 획기적인 법안이다. 김근태 지역구였던 도봉구만 따져도 일년에 200억 원의 추가 세수가 들어왔다. 다른 강북지역에도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여당 정치인 생활 10년 간 실패와 좌절은 많았고 성공은 적었다. 그래도 김근태의 반독재 투쟁 20년 만큼이나 여당 생활 10년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근태 빠'라는 이야기 들어봤나?

하지만 이런 것들이 대중적 인기로 연결되진 못했다. '김근태 빠'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18대 총선을 이틀 앞둔 2008년 4월 7일 김근태와 신지호가 맞붙은 도봉을 선거구를 돌아봤었다. 김근태 사무실이나 홈페이지, 홍보물에는 지방세법 개정안이나 영리병원 저지 같은 건 안 보였다. 대신 "법조타운을 유치했습니다", "학교를 지었습니다", "뉴타운을 건설하겠습니다" 같은 차별성 없는 공약만 넘쳐났더랬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김근태의 측근들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 뉴타운이나 특목고가 아니면 안 먹힌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지호는 "여당 정치인인 내가 뉴타운도, 삼성 계열사도 유치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신지호는 당선되고, 김근태는 낙선했다. 물론 도봉을에 뉴타운이나 삼성 계열사가 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김근태는 투병에 들어갔다.지난 6. 2 지방선거 당시 김근태는 딱 한번 일반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원순의 도봉 지역 유세에 함께 했던 것이다. 초췌한 모습으로 손을 한 번 흔들었을 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김근태의 사람들은 "사진은 내지 말아 달라"고 언론에 협조를 요청했고 거의 모든 언론이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한 표 달라기 전에 김근태와 자신을 비교해보길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할 때도 김근태는 늘상 손수건을 들고 다녔다. 물고문 와중에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너무 마셔서 만성 비염을 달고 살았던 것이다.

언젠가 김근태가 "나는 정치에 안 어울리는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김근태는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때 아홉 명이 한줄로 앉아있으면 한 명 씩 차례로 나가서 연설을 하고 들어왔다. 차례로 나가서 뒤에 있는 사람들을 신나게 조지고 뒤돌아서선 웃으면서 악수하고 자리에 앉더라. 나는 신나게 조지지도, 웃으면서 악수하지도 못하겠더라"고 말했다.

자신의 회고대로 김근태는 최소한 한국정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니면 한국정치에 적합하기엔 너무 맑고 곧은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근태는 가장 높은 존중을 받아야 할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란 점이다.

민주통합당 당권 경쟁이 한참이다. 야권에서 내년 4월 총선 금배지를 노리는 이들이 1000명은 넘는다. 12월 대선 꿈꾸는 사람들도 몇이 된다. 그중엔 김근태 키즈들도 많다. 당권 주자 중에도, 서울시에도, 민주통합당에도 수두룩 하다. 그들이 김근태를 보면서 "저래선 정치 성공 못하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들 김근태와 자기를 한 번 씩 비교해 보길 바랄 따름이다. 64살이면 아직 이른 나이, 김근태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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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타계]독재와 어둠의 시대에 ‘희망’을 얘기한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 민주화 운동의 얼굴이고 궤적이었다. 5년6개월에 걸친 두 번의 투옥, 26번의 체포, 7번의 구류, 사선을 넘나들었던 고문…. 독재가 지배하는 어둠의 시대를 살면서 그는 희망을 얘기했다. 고문이 할퀴고 간 몸으로 한발 한발 디뎌온 64년의 일생은 인권-양성평등-평화를 주창하던 한 민주주의자의 기록이었다.


■ 강제징집된 12남매의 막내

김근태는 1947년 2월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12남매의 막내였다. 초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3차례 초등학교를 옮기다 양평 양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광신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부친은 김근태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교직을 강제로 그만두게 된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동대문시장에서 스타킹과 양말을 떼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김근태는 “그때의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 민주화 운동 역정이 시작됐다. 1967년 상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뽑힌 김근태는 8월 6·8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이끌고 제적된 뒤 강제징집을 당한다. 김근태의 친형인 소설가 김국태(2007년 사망)는 1970년 발표한 단편 <물 머금은 벌>에서 데모 주동자로 강제징집된 아우를 형이 훈련소로 전송하는 내용을 담았다. ‘아우’는 ‘형’에게 “비록 내가 이처럼 부당하게 끌려가지만 나는 내가 한 행동에 후회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위로부터 여섯 명의 형·누나는 어릴 때 숨지고 그 다음 세 형은 6·25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12남매 중 10번째인 형 김국태가 사실상 집안의 맏이 노릇을 했다.

김근태 민청련 의장(왼쪽)이 1988년 석방된 뒤 부인 인재근씨(오른쪽)와 함께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양심수 전원 석방과 수배해제 및 사면복권 쟁취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수배생활의 벗이 된 인재근

김근태는 1970년 제대하고 복학해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71년 2월 유신독재에 저항한 서울대 학생 시위를 배후조종한 혐의(내란음모)로 첫번째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조영래·장기표·심재권 등이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검찰이 이들의 공소장에 표현한 ‘공소 외 김근태’는 그의 별명이 됐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가 됐다. 박정희 정권이 막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로 살았다. 1970년대 어느 겨울 밤, 은신처를 구하지 못한 김근태는 통금시간을 넘겨 서울 도곡동의 갈대밭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자리뛰기로 찬바람과 맞섰지만,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떨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슬며시 먹빛으로 변하고, 먹빛 하늘이 청동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결국 저에게 아침은 왔다.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피신 상태에서도 1972년 2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변형윤 상대 학장의 ‘결단’으로 복교조치가 됐기 때문이다. 김근태의 꿈은 교수였다. 하지만 “유신은 투쟁 이외에 다른 대안의 선택을 내 양심에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근태는 도피 중이던 1977년 8월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위장취업 중이던 이화여대 출신 인재근을 만나 결혼했다. 1977월 5월 김근태가 6세 연하인 인재근에게 서울 광나루의 선상 매운탕집에서 “나랑 결혼하자. 그렇지 않으면 어디든 도끼를 들고 쫓아가겠다”고 ‘협박성 구혼’을 했다. 인재근은 훗날 “(청혼에) 기분좋았다”고 했다. 인재근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지냈다. 말을 배우고 가장 많이 한 말이 “양심수 석방”이라고 하는 그는 김근태의 ‘민주화 동지’였다.

■ 고문과 투옥으로 메워진 30~40대

포승줄에 묶인 김근태 전민련 집행위원장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는 “매 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김근태)이었다. 김근태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조직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을 맡았다. 최초의 독자적·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였다.

공안당국에 그는 눈엣가시였다.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됐다.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는 1987년 대통령선거를 경주교도소에서 맞이했다. 선거 당일 자정이 넘자 그는 교도관에게 결과를 물었다. “몰라서 묻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패배였다.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근태는 ‘갖다 바친 패배’에 절망했다. 그는 여소야대 13대 국회가 출범한 뒤 1988년 6월30일 수감생활 2년10개월 만에 정부의 유화적 제스처로 석방됐다.

김근태는 1989년 1월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87년의 패배 후 흩어진 민주·진보세력을 다시 묶고, 그는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노태우 정권은 3당 통합 반대 시위가 잇따르자 1990년 5월 전민련 결성선언문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다시 1992년 8월까지 그를 옥살이 시켰다.

■ 시작도 끝도 비주류였던 정치

김근태는 1995년 정치의 문턱을 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까지, 27년간의 3대 독재에 맞섰던 ‘재야 운동가’에서 제도권 정치인이 된 것이다. 그해 9월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를 축으로 한 재야 인사들을 이끌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했다. 부총재를 맡았다. 그는 “오랫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온 세력, 민주정통세력이 집권하는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복권되지 않아 15대 총선 출마가 불투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10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케네디가 강력하게 김근태의 복권을 요청했고, 김 대통령이 결국 받아들여 15대 총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됐지만 개혁성향이 강한 김근태는 ‘비주류 정치’를 시작했다.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김근태는 2001년 9월 당 대표 선임을 둘러싸고 “당 위에 군림하는 특정계보가 있다”며 동교동계 해체를 촉구했고, 이에 권노갑 전 고문이 “동교동계는 민주당의 뿌리이고 역사”라고 발끈하며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2002년 1월 김근태 당시 민주당 고문(가운데)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16대 대통령 당내 경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는 2002년 16대 대선에 도전했다. 노무현 후보와 ‘개혁후보 단일화’를 조율하다 실패했다. 경선에 나섰지만 대세를 잡지 못하고 그해 3월 후보를 중도 사퇴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당시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에게 2000만원을 받았으며 2억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했다. ‘원칙주의자 김근태’ ‘바보 김근태’의 두 목소리가 부딪친 시절이다.

노 대통령과는 자주 충돌했다. 2004년 6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총선 공약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그는 직접 “공공주택 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는 개인성명을 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당 복귀 후에는 2006년 6월부터 8개월간 침몰하던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았다.

세는 없고 바른길과 명분을 고민하던 김근태 정치는 느렸다. 재야 시절과 달리 고비마다 망설임도 많았다. 그러나 달궈지는 쇠처럼 결심하면 단단했다. 2007년 한·미 FTA 반대 단식농성이 그랬다.

■ 평생을 괴롭힌 고문 후유증

김근태는 17대 대선에 다시 도전하다가 2007년 6월 도중에 사퇴했다. 몸을 던져 ‘야권통합의 불’을 댕긴 것이다. 건강도 포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어눌한 말투, 불편한 거동, 굽은 어깨…. 갈수록 커져가는 고문 후유증을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훈장’이라고 했다. 그는 고문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 2001년 대선 경선을 준비하는 그에게 측근들은 고음 연설 때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며 코 수술을 하라고 했다. 마취를 시작하자 수술대에 누운 김근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김근태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술회했다. 시술용 의자가 전기고문을 받던 의자로 연상한 치과에도 가기를 꺼린다. 물고문당할 때 냄새가 익었던 특정 비누도 쓰지 않는다. 만성비염과 손수건을 달고 살던 김근태. 그는 임종 직전 무의식 상태에서도 코로 영양분을 공급하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해 가족들을 울렸다. 평생 그의 생을 옥죈 고문의 트라우마였다.

그는 2007년 12월에는 완치 불가의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다.

2008년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 진중권 당시 중앙대 겸임교수(왼쪽)가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을 인터뷰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늘 부족함이 많다던 그가 떠났다

김근태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패했다. 김근태조차 ‘반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을 피할 순 없었다. 특히 신 후보가 뉴라이트 출신이었다. 김근태는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마지막 화두는 정권교체를 향한 야권통합이었다. 김근태는 지난 3월 민주당 내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았다. 진보정당 인사들과도 만나 대통합을 역설했다.

김근태는 ‘희망’을 얘기했다. <희망의 근거> <희망은 힘이 세다>…. 책 제목에도 희망이 많다. 김근태에게는 “(1980년대) 죽음으로 내몰렸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할 수 없었던” 꿈이 있었다. 블로그에 적은 세 가지는 ‘정직한 나라(한국)’ ‘평화와 공존의 시금석(한반도시대)’ ‘협력과 발전의 새로운 공동체(동아시아연합)’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항상 평화로운 사람, 정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욕심 같은 바람은 ‘생각의 사람’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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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민주화 역사에 가장 굵은 글씨로 새겨질 이름, 김근태

»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정이 모셔지고 있다. 한겨레 사진
이 땅의 민주화가 한두명의 피땀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역사에 김근태라는 이름은 가장 굵은 활자로 아로 새겨질 것이다. 김근태(1947~2011)는 암흑의 시기였던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었다. 온몸으로 역사를 진보시킨 진정한 투사였다.

 그를 운동가로 만든 것은 박정희 독재체제가 낳은 암울한 시대상황이었다. 서울대 상대(경제학과) 3학년 때인 1967년 김근태는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저항의 길을 걸었다. 70년 복학한 뒤에는 동기생인 고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손학규 등과 함께 교련반대(1971) 등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71년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수배받는 처지가 돼,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1979년 말까지 쫓겨 다녔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선다. 당시 우리 사회는 1980년 5·18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에 눌려 학생운동도 움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민주화의 길’이란 소식지 발간과 각종 집회를 통해 민주화 투쟁의 불길을 당겼다. 그 중심에는 초대 및 2대 민청련 의장을 맡은 김근태가 있었다.

김근태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그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곧바로 끌고갔다. 이때부터 김근태를 서울대 학생운동권 조직인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와 그 투쟁문건이었던 ‘깃발’의 지도자인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만들기 위한 권력 차원의 조작이 시작됐다. 김근태는 9월25일까지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모두 10차례나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문기술자를 돕던 사람조차 김근태가 홀로 남았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고 울먹일 정도였다.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 김병곤 등도 함께 고문을 당했다. 이을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그해 12월19일 법정에서 ‘짐승의 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하지만, 김근태는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 고문 폭로를 위한 법정투쟁에 나섰다. 그는 전기고문 때 발뒤꿈치에 생긴 주먹만한 상처 딱지를 수거해 감옥에 따로 보관했다. 그해 12월13일 접견온 이돈명 변호사와 목요상 의원에게 상처딱지를 건네려했지만, 교도관에 의해 제지당하고 끝내 중요 증거물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망가진 신체를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 법원에 낸 ‘신체감정 증거보전’ 신청도 정권의 압력으로 기각당했다.

 그러자 부인 인재근이 투쟁을 이어갔다.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로부터 고문의 실상을 기적적으로 잠깐 들은 인재근은 이 사실을 감옥 밖에 널리 알렸다. 특히 그는 이미자 노래테이프 중간에 고문 내용을 녹음한 다음 이를 미주 한국일보 기자인 심기섭을 통해 해외로 내보냈다. 이 사실은 뉴욕타임즈 등에 크게 보도됐으며, 전두환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그 공로로 김근태와 인재근은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87년)을 받았으며,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으로부터는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88년)됐다. 그는 1988년 중반 석방된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민주화와 평화운동을 하다가 1990년에서 92년까지 다시 구속됐다.

재야의 대표적 인물이던 김근태는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이후 김대중이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됐다. 이후 17대까지 세번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당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불의에는 강하되 약자에게는 따뜻한 기품을 유지했다. 항상 진지하고 정직한 그에게 동료들은 “국제신사”란 별명을 붙여줬다. 1999년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한 제1회 ‘백봉신사상’에 선정되고, 같은 해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차세대 지도자’에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타협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던 그는 자주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쳤다. 2002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세를 얻지 못해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때 권노갑 고문에게 2천만원을 받았으며, 2억4천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원칙주의자로서의 김근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2004년 6월 아파트 분양원가 논쟁 때는 김근태는 당시 대통령 노무현과 맞서기도 했다. 노무현이 그해 4월 17대 총선공약으로 열린우리당이 내걸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자 개인성명을 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정면으로 항의했다. 그해 11월 보건복지부장관 시절 정부의 국민연금 주식투자 동원 움직임에 반대해 김근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해내겠다”며 국민연금 지키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을 휩쓴 ‘반 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도 비껴가지 않았다. 김근태는 뉴라이트 출신인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는 등 재기를 꿈꿨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 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 한다.…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지난 10월18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인 ‘김근태가 살아온 길’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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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