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해인 김근태 기고문

20016[통권 제232]

유마의 방 - 정치, 정치인, 화두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사물에 몰두하면서 헌신할 수 있는 열렬한 정열 그리고 사물과 거리를 두고서 바라보는 냉정한 관찰력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요즈음 나의 화두이기도 하다.

요즈음 부쩍 주변사람들로부터 코 수술을 권유받고 있다. ‘목소리까지 유권자들에게 부담을 준다면, 요즈음 같은 이미지시대에 큰 손해 아니겠느냐고 반농半弄조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고, ‘15년여 동안이나 사시사철 비염으로 고생을 하니 어떻게 하느냐’`고 정색을 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다. 사실 나는 지금 꽤 건강한 편에 속한다. 조기 축구회에 나가 신나게 공을 찬다. 이런저런 일로 오르게 되는 산행을 큰 무리 없이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이따금 특히 환절기에 불쑥, 예기치 않게 흘러내리는 콧물 때문에 애를 먹곤 한다.

내가 가진 비염은 지난 시절 군사정권의 선물이다. 1985년 당시 `민청련` 의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남영동에 끌려가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전기고문, 물고문의 후유증이다. 코 수술이라는 것이 요즘은 레이저로 간단히 수술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들어서 안다. 그러나 지금껏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죽음의 문턱까지 끌려갔을 때 마음에 생긴 상처, 두려움 때문이다.

나는 수계를 받은 불자는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도 얻지 못했다. 그렇지만 짧지 않았던 감옥 생활에서 읽었던 부처님의 말씀은 아직까지도 어떤 울림으로 남아 있다. 그 중 몇 구절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랜 재야운동의 인연으로 지금껏 내게 가르침을 베푸시는 스님들도 계시다. 또한 우리 곁을 떠나서 수도생활한 지 40여 년이 넘는, 지금도 가난한 그래서 안타까운 나의 고종사촌 형님 법화 스님이 저어기에 계신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나는 아직 부끄럽다. 아마도 프로 정치인으로서는 부족한 점일 것이다. 여하튼 이처럼 개인적 인연으로 나는 불교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어처구니없던 군사정권 시절, 억압과 광기가 난무했던 그 야만의 시대에 사람의 목숨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사이에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고통의 과정에서 배웠던 것 같다.

산에 오르는 길에 마주치는 산사에 들르면서, 스님들을 뵈면서, ‘사람의 목숨이 며칠 사이에 있는 것도, 밥 먹는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며, 호흡하는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 때 도를 알 수 있다면 나도 반은 부처님의 말씀을 혹시 체득한 것은 아닌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는 사이사이에만 살아 있었으니 말이다. 큰스님께서 들으시면 꾸지람을 내리실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1995년도의 일이라고 기억한다. 당시 나는 야당인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권통합 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 즈음 성폭력 상담소에선가 일하던 여의사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그냥 재야에 남아서 사회의 등불이 되어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 분의 말은 이른바 현실제도권정치에는 기댈 것이 없다는 나름대로의 평가와 함께, 나 자신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복합적으로 드러낸 것일 터였다. 그렇지만 당시 나의 심정은 정치판에 들어가 망가질 것이 뻔하다는 그 분의 나에 대한 걱정보다도 결국 당신도 출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느 사람에 불과하지 않느냐하는 실망감의 표현인 것 같아 내심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웠다.

현실정치판에 들어온 이후에는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써라라는 말부터 너무 신중하고 이상론에 치우친 것 아니냐’, ‘자기 색깔이 왜 없느냐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말을 들었다.

정직과 성실을 버릴 수도 없지만 그와 동시에 냉정한 계산 또한 요구되는 현실정치의 주문은 내게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살 수는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점에서 모름지기 정치인들이야말로 중생이 앓으니 보살이 앓는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헤아려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처럼 국민들이 정치에 등 돌리고 정치인들에게 손가락질할 때야말로 정치가 국민에게 무릎으로 다가가야 하고, 그럼으로써 정치인이 국민에게 필요한 존재로 다시 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내가 존경하는 대학 은사 변형윤 선생님은,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시절에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warm heart, cool head)’라는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의 경구와 그 정신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정치에 입문한 지 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은사님의 가르침과 함께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글에서 그는 정치가의 자질로 정열, 책임감, 관찰력을 들었던 것 같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한 인간의 영혼 속에 단순 무익한 격정이나 낭만적 태도가 아닌, 사물에 몰두하고 헌신할 수 있는 열렬한 정열사물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냉정한 관찰력을 같이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대목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정치는 결코 경박한, 무책임한 유희가 아니며 진정한 인간적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며 설득하는 일은 정말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고통과 쾌락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진정한 중도의 이치를 말씀하면서 시작하신 것 아닌가. 자질이 부족하고 근기도 부족하여 그 끝이 어디가 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만 온 몸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자 한다.

나는 지역감정의 탈피와 개혁의 성공 그리고 한반도에서 평화가 실현될 때에만 우리 민족이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매우 어렵다. 지역감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개혁은 지체되고 답보상태에 있다. 냉전적 사고는 아직도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하지만 정치야말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고,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에게는 그 어려운 시대를 넘어 이만큼의 경제와 이만큼의 민주주의를 일구어낸 저력이 있지 아니한가. 우리의 미래인 젊은이들이 한반도 내의 동과 서, 남과 북에 머물지 않고, 복구된 경의선, 경원선을 따라 유라시아 대륙으로 세계로 배낭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가.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나는 내가 겪었던 그 끔찍한 기억들을 모두 묻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만 생각할 작정이다.

다시 젊은 시절, 그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지금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서원을 세우는 것, 이것이 요즘 나의 화두이고 화두인 것이다.

월간 해인 www.haein.org (출처:http://me2.do/5DpJI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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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김근태가 갔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구나

나더러는 조시나 쓰라 하고

김근태가 또 먼저 갔다

고문 끝에 온 민주주의

견디다 못해 몸이 굳어져갈 즈음

그 모진 고통의 기억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겠지





우리들의 정신적인 대통령

그대를 잊지 못하리

그대가 몸 바쳐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눈물겨운 꿈의 세포는

살아서 이 시대를 견디고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2012년 새해 아침을 탈환하리

정희성/시인·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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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그의 손은 마치 의수처럼 굳어 있었다. 손가락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고문 후유증이었다. 김근태의 몸은 부끄러운 우리 시대의 어제를 증언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주어 미안하다"고 그는 말했다. "분노하고 도전해야 문제를 알고 극복할 힘이 생긴다"고도 말했다. 굳어버린 입에서 느릿느릿 흘러나온 말에 결기가 서려 있었다. 그로부터 그는 불과 6개월을 더 살았다.

손 아래로 '주간 정세'가 보인다. 왼편에는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의 사진이 보인다. 그는 인생의 끝까지 '세상'을 놓지 않고 있었다. 2011년 6월 22일 도봉구 그의 사무실에서 찍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손. 그의 손은 마치 의수처럼 어색하게 놓여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최형락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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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 유성호
 김근태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대표적인 고문 피해자인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투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근태 상임고문도 따뜻한 남자였다"는 작가 고 박완서씨의 글이 회자되고 있다.

 

박완서씨는 1992년 6월 김근태 상임고문이 옥중편지를 모아 펴낸 책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의 발문을 썼다. 박씨는 발문에서 "'김근태는 투사다'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김근태는 괜찮은 남자다'라고 말해줘도 조금도 실례가 된 것 같지 않다"고 밝혔다.

 

박씨는 "그 짐승 같은 시간에 일어난 하늘 무서운 일을 낱낱이 생생하게 증언할 수가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던 그가 외경스러운 나머지 고문자 못지않게 독한 데가 있는 사람이려니 여겼다"면서도 "그가 옥중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자기만 아들딸 있는 것처럼 알뜰살뜰하고도 살갑고 따뜻한 그의 부정에 절로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났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용기란 냉엄이 아니라 따뜻함이라는 걸, 강함이란 날카로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라는 걸 확인한 것 같아 기쁘다"고도 했다. 고 박완서씨는 담낭암으로 2011년 1월 세상을 떴다.

 

다음은 박완서씨가 쓴 발문 전문이다.

 

나는 고문자도 치가 떨렸지만 김근태도 사실은 무서웠습니다.

 

용기란 냉엄이 아니라 따뜻함입니다.

 

김근태씨를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먼 발치에서 본 적도 없습니다. 그의 이름을 언제부터 알았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된 것은 그가 폭로한 고문사실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마 1980년대 중반고개를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눌려 허덕거리며 넘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법정에서 진술한 끔찍한 고문 내용은 신문에도 났고 더 상세한 건 유인물을 통해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같은 인두겁을 쓴 사람끼리 그럴 수가 있을까? 그가 외친 그대로, 정말이지 인간성에 대한 절망으로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그 후 때때로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만일 그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보곤 했는데, 나라면 고문도구만 보고도 아니 고문자의 얼굴만 보고도 그 앞에 구더기처럼 기면서 그가 원하는 모든 사실과 모든 이름을 술술술 말해버릴 게 확실했습니다. 그러니 나 같은 건 운동하는 사람하고는 이름도 모르고 지내는 게 수였습니다. 무슨 엉뚱한 화를 미칠지 모르니까요. 아무리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가 소원이라 해도 나로서는 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짐짓 눈감고 귀먹음으로써 획득한 그 무렵의 나의 안일엔, 그런 뜻으로 김근태란 이름 자체가 고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나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근태는 다시 감옥에 있고, 그를 고문한 기술자는 어디선가 백주의 대로를 활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잔혹한 고문자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게 무섭고도 치욕스러운 것 또한 1990년대의 고문입니다.

 

나는 고문자도 치가 떨렸지만 김근태도 사실은 무서웠습니다. 도대체 어느 만큼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가졌기에 그런 무자비한 형벌을 견디고도 살아 남아 온전한 정신과 기억력으로 그 짐승 같은 시간에 일어난 하늘 무서운 일을 낱낱이 생생하게 증언할 수가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던 그가 외경스러운 나머지 고문자 못지않게 독한 데가 있는 사람이려니 여겼습니다.

 

얼마 전 처음으로 그의 부인 인재근씨를 만나보고 그가 옥중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기만 아들딸 있는 것처럼 알뜰살뜰하고도 살갑고 따뜻한 그의 부정에 절로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났습니다. 독할지도 모른다는 오해도 풀렸거니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어서 외경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그와 친해진 것 같은 묘한 안도감까지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용기란 냉엄이 아니라 따뜻함이라는 걸, 강함이란 날카로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라는 걸 확인한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했구요. 아이들이 잘 자라는 모습 또한 여실해서 대견하고, 그밖에 가족, 친척, 친구 등 애정 넘치는 분들이 그를 그답게 받쳐주고 있다는 게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빨래를 하다보면' 같은 글을 읽으면서는 괜찮은 남자치고 여자 무시하는 남자 못 봤다는 평소의 내 생각이 틀림없었다고 쾌재를 부르기도 했답니다. 김근태는 투사다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김근태는 괜찮은 남자다라고 말해줘도 조금도 실례가 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그의 글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머지않아 자유의 몸이 될 그 괜찮은 남자에게 이 책의 발간이 이중의 기쁨이 되리라 믿으며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1992년 6월 5일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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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미안합니다

 

야윈 당신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오그라들고 당신을 이루고 지탱하던 신념 뒤에서 말없이 각자의 몫을 다하던, 세포 하나하나가 굳어가는 고통은 알아채지 못한 채 '좀 잘 하지. 힘 있게 좀 더 못 하나…' 뒤에서 주문만 했으니 정말 미안합니다.

 

  
▲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이 영정사진을 모시고 빈소로 향하자, 한명숙 전 총리와 노회찬 통합진보당 대변인이 고인의 넋을 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유성호
 김근태

지상파에서 보여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늘 기어들어가고 목은 뻣뻣하고 어깨는 경직된 것 같았습니다. 어렵고 위중한 사안앞에서도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팔을 올렸다 내리며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다가가 크게 손을 흔들어 악수해대던 정치인들 사이에서, 왜소한 모습으로 말없이 미소짓고 있던 당신은 마치 거인국에 온 걸리버 같았습니다. 그런 당신의 겉모습을 보고 우리들은 '패기가 없다' '지도자적 카리스마가 없다' 며 쉽게 마이너스 판정을 내리곤 했습니다.

 

20대 초반 처음 만난 때부터 당신의 목소리는 나직하였습니다. 열대여섯이나 어린 한참 후배 앞에서도 당신은 높임말을 썼으며, 가르치려 하기보다 가만가만 당신의 생각을 찬찬히 펼치며 하나하나 처음부터 다시 보여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조심스레 각자의 의견을 묻는 것 같았습니다. 스물 서넛 밖에 안 된 청년학생들에게.

 

학내에서 사찰을 벌이던 유도 태권도 합쳐 10단은 된다는 유단자 고수들인 짭새가 학교에서 물러가고, 까딱하면 증거도 없이 엎어치고 메어쳐서 경찰서 파출소로 잡아가던 전두환 정권이 서슬 푸르던 공안통치의 커튼을 드디어 내리던 때였습니다. 너희한테 자율권을 주겠으니 잘해보라던 1984년 봄이었습니다. 한낮에 찾아가서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나누던 대화의 결론이자 핵심은 사물의 본질과 민중의 살아있는 현실을 중심으로 보아야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길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의 과거와 다가오는 미래의 중간에 다리를 놓는 것이 지금 할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급하게 열매만 딸 것이 아니라 뿌리를 다지고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상이 제 아무리 자율화고 민주화고 유화라고 하지만 본질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한계적인 민주화조치는 오히려 더 극악한 모순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열매로 착각하는 한 나무는 열매 몇 못 맺고 시들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상과 제스처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보고 그 진실에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난 범벅이던 운동권 시절에도 곡절 많은 정치판에서도 시대와 사람을 보는 눈이자 당신의 숨은 잣대였을 겁니다.

 

당신은 겸허했습니다

 

그러하므로 진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타자에게만 폭력적으로 들이대는 잣대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공인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였으므로. 인간세상의 법을 넘어 세상만물을 바라보는 공평무사한 기준이었으므로. 그러므로 겸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심 없이 거래가 지워진 낮은 눈빛으로, 시끄러운 복판에서도 나직나직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참으로 대화라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아마도 내면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정신이었을 겁니다. 홀로 석고대죄하고 있는 의사당에 문인 몇이 위로삼아 찾아갔을 때도 떠들썩한 인사동 밥집에서 만났을 때도 당신은 위력자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일개 문인 중 한 사람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오래 못 본 친구 하나 앉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말이나 시선에도 은근하고도 엄연히 존재하는 독점이나 점유 같은 것들이 당신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쌍말이 오가고 멱살잡이가 빈번히 출몰하는 정치판에서도 삿대질하거나 싸잡아 비난하거나 호통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투쟁과 수배와 투옥으로 점철된 지난날의 상처를 이력 삼아 떠벌이는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부자연스러워지는 몸동작 또한 당연히 고문 후유증이겠으나 고통을 과장하거나 이렇다 저렇다 해명하지도 않았습니다. 평생 논밭구렁에서 일해 허리가 낫처럼 구부러진 어느 농부가 나 이만큼 일했다고 민주화보상금을 받는 거 보았습니까. 톱니바퀴 돌아가는 트럭에 아슬아슬 서서 가고 있는 어느 청소부가 나 이만큼 고생했다고 찬탄을 요구합니까. 딱히 투사고 영웅이어서가 아니라 시대가 피해갈 수 없는 그 모퉁이 자리에 있었을 뿐이므로. 누군가가 맞아야 할 정을 자신이 맞은 것뿐이므로. 고통의 나무에서 자란 과실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역사의 음지에 매장된 매 맞고 총 맞고 흙구덩이에 묻혀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것이므로. 그 과실 속에 담긴 씨앗이 자라 새로 태어나는 어린 입들에게 단 과육이 고루 주어져야 하므로. 이 땅의 민주주의는 저 사방팔방 확 트여 소유도 없고 주인도 따로 없는 드넓은 들판에 거대한 나무가 되어야 하므로.

 

날이면 날마다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주민들이 철거된 도시 곳곳마다 마천루는 높아가지만 인간도 소 돼지도 행복하지 않은 시대에 당신의 고통스런 숨은 멈췄습니다. 강은 파헤쳐지고 바다에는 시멘트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드를 쳐대니 영문도 모르고 집을 잃고 하소연도 못하는 피라미도 붉은발말똥게도 눈물 뻐끔거리는 시대에 당신이 꿈꾸던 미완의 혁명은 멈추었습니다. 99명의 불행과 한탄과 눈물과 노고 위에 쌓아올려진 1명의 승리자가 위태로운 첨탑에 장군처럼 서 있는 이 한밤중 당신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쌓아두고도 받아 챙기고 숨기며 위력적인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지금은 밤입니다. 불빛 수만큼 집집마다 새어나오는 것은 한숨소리요 불면이 일용할 양식인 일자리 없는 자들의 흐느낌입니다. 숨이 턱까지 닿게 뛰어도 생존조차 걱정해야 하는 네온싸인 화려한 지금 이 시대는 칠흑 같은 밤입니다. 사회에 발을 딛어 보기도 전에 빚에 허덕이며 젊다고 말하기에도 미안한 목숨들이 다 펴보지도 못한 날갯죽지가 부러져 고공에서 뛰어내리는 이 시대에 떠나간 당신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 앞에서 석방의 기쁨에 만세를 외치는 김근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김근태

갑남을녀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못나고 못 배우고 약한 자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이 시대가 바로 야만입니다. 한결같이 강하고 똑똑하고 잘난 것들에 사족을 못 쓰는 불편하고 불안한 이 시대를 슬퍼합니다. 이 야만의 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애쓰다 애쓰다 끝내 손을 놓친 당신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지도자로서가 아닙니다. 실패하고 거꾸러지는 이 땅에 숱한 갑남을녀 장삼이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이른 죽음을 슬퍼합니다. 얼어붙은 겨울, 시장 모퉁이에서 파와 시금치를 다듬고 고등어 떨이를 외치는 고단한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박스를 끌고 가다 박스를 떨어뜨리고 차의 경적소리도 듣지 못한 채 자기 몸을 덮치기 직전에 바퀴를 멈춘 질주하는 차 사이에서 주저앉아 박스를 줍고 있는 허름한 민생으로서 당신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승리자여서도 아닙니다. 당신은 개인적으로 승리한 적이 없으며, 패배 또한 우리 공동의 것이었습니다. 졌으되 위대하게 패배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게 어딨습니까. 당신은 위력적이지 않았으되 고문과 폭력과 위선과 치부로 점철된 우리의 슬픈 역사를 증거했습니다. 말없이 몸으로 감당한 만큼 큰 진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오랫동안 다치고 아프고 약했습니다, 자랑하고 내세울 것 없이 묵묵히 제 일을 하고 그렇게 살다가는 이름 없는 다수의 민중들은 무력합니다. 착취하지 않고 제 것 이하의 값을 받으므로 가난하고 힘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나약하지 않으며 끈기있게 하루치의 자기 몫을 다하며 일생동안 살아갑니다. 그것이 강인함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위대한 이유이자 이 땅의 주인인 근거입니다.

 

화려한 언변과 큰 목청과 화려한 제스처에 중독되어 우리는 진실을 곧잘 놓칩니다. 지도자는 지배자가 아닙니다. 국민 하나하나를 굽어보고 살펴보고 고민하고 어떻게 더불어 잘 살게 할 것인지 궁구하고 실행하는 자가 위력적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진실하게 만백성의 안위와 행복과 평등을 위해 고뇌하는 자가 목소리가 커질 필요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숱한 강력한 것들 때문에 우리 삶은 겁에 질리고 피폐합니다. 들여다보면 부풀려진 강력한 입들 때문에 우리는 기죽고 신경쇠약에 걸려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때 이른 죽음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정치라면 권력과 치부와 위선과 동격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참답게 슬퍼할 수 있는 선배의 모습으로 살아 주셨으니. 당신의 순정한 생애가 우리의 가리운 눈을 뜨게 하고 참 민주의 밑거름이 되길 소망합니다. 부디 제 몸을 녹이는 아픔 속에서도 촛불로 타오른 당신의 생애가 가난하고 무력한 만백성에게 따스한 희망이 되어 주기를. 희망 속에서 눈을 감고 희망으로 눈을 뜨는 아침을 창조하고 싶어지기를. 당신이 가고 없는,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께서 돌아가신 그곳엔 부디 미움도 슬픔도 싸움도 고문도 없기를….

 

* 글쓴이 김해자는 시인입니다. 전태일문학상, 백석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 <축제>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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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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