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해야 한다면 김근태가 하겠습니다.

새로운 민주당을 위하여

누군가는 이 정치, 이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김근태가 해 보겠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개혁적 현실주의자로 자리매김해 봅니다.

다른 이들처럼 마구 호언장담하고 무작정 앞서가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그 길의 끝에 서면 저기서 흐트러지지 않고 정직하게 오는 “김근태”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저널리스트가 50년대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그 말에 나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서 우리는 결국 민주화를 성취해 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에게 꿈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 꾸는 사람은 어쩌면 몽상가나 허황된 이상주의자로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꿈이 있어야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꿈을 갖고서 결연히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걸어가는 그 길에 머잖아 동료들과 국민들이 동참해 주리라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종의 약속은 정직한 리더십, 정직한 정부, 정직한 나라, 그리하여 마침내 괜찮은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들과 성시한 사람들이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할 말은 하고, 생각은 분명하게 가질 것입니다.

김근태의 정치, 김근태의 비전이 어떻게 21세기의 첫 리더십과 그 궤를 같이 하는지 지켜봐 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무대는 김영삼 정권 이래 “변화와 개혁”, “공저엉과 투명성의 확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발전했고, 이것은 정권 교체와 함께 국민의 정부가 등장하면서 더욱 증폭되어 후회할 수 없는 과제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계승하고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고 지금 후퇴하면 과거보다 더 무서운 수구화가 진행될까 저의기 두렵기도 합니다. 파시즘의 발흥이 열정보다는 권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풀린 자동차마냥, 감당할 수 없는 대립의 절벽으로 나아가는 정치 다툼은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야당에게 주문하고 싶습니다. 여당 또한 바르고 빠르게 쇄신해야 합니다, 어제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십 년 권좌에 섰던 그들은 폐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가 새로운 미래를 정착시킨 것은 아닙니다.

나는 먼저 새로운 민주당을 만드는 일에 혼신을 다할 것입니다.

새로운 민주당은 나의 꿈이며 미래입니다.

출처 : 1998년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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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간디에게는 네루가 있었다

개혁적 현실주의자

성폭력 상담소에서 간부로 일하는 여의사 한 분이, 1995년 내가 민주당에 입당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그냥 재야에 남아서 사회 속의 등불이 되어 주셨으면 했는데.” 한두 번 들은 이야기도 아니지만, 매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습이 철렁철렁했습니다.

애정이 실려 있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도 결국 출세를 위해서 발버둥치는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는군” 하는 실망감이 역력한데에다 이제부터는 관심을 거두겠다는 선언 같아서 당황하곤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결국 나도 권력 의지에의 충동으로 코뚜레 낀 소가 되어 끌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되물음으로부터 완전히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솔직한 나의 내면 풍경입니다. 물론 처음 정계에 들어섰을 때 내 나름대로 명분과 뜻이 분명했고 또 단순한 권력욕의 유혹 따위에 지지 않을 의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지만 말입니다.

지금도 나는 그 분의 애정어린 비판을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벤 킹슬러가 주연한 영화 “간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간디도 간디지만, 네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간디의 뒤에는, 인도의 국민에게는 네루가 있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영혼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이며 전국을 순회하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 투쟁을 벌일 때, 위대한 현실주의자 네루는 간디의 그 숭고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간디에게는 간디의 길이, 네루에게는 네루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해방 전후 상황과 비슷했던, 그러나 대처 방식은 크게 달랐던 프랑스의 역사가 생각납니다. 그들도 연합군의 도움으로 나치 점령에서 벗어났지만, 종전에 즈음하여, 드골 장군은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기 전에 모든 레지스탕스가 궐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프랑스인 스스로 프랑스를 해방시켰다는 역사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는 그러한 정당성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나치의 잔재를 청산할 수 있었고,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하던 그때, 나는 우리나라가 민주화로 인해 새로운 공간이 많이 늘어났다고 보았으며, 그 곳에서 “네루의 길”이, 도덕적 자부심에 기초한 “드골의 지혜”가 좀더 필요하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제 올바른 역사 인식 위에서 지혜와 결단의 정치 능력을 보일 때입니다. 그래서 김근태의 정치, 김근태의 비전이 지금까지의 정치의 구태와 어떻게 다른지 보아 달라고 주문해 봅니다.

새로운 내일을 여는 새로운 사고와 방법으로 정치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실천할 용기와 신념으로 내가 서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1998년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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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나는 1985년 지옥의 남영동을 나선 다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치감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따스한 오후의 햇빛을 온몸에 받았다. 아, 이 햇빛 속으로, 이 낮익은 거리로 나는 돌아온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날 헤아려 보니 스물대여섯 번 체포당했고, 십수년 동안 수배받아 피신해야 했으며, 5년 6개월 동안 형을 살았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맛보아야 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를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때 그 길을 돌이켜 보면 적어도 이 두 가지는 얻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것이고, 또 조금이나마 역사의 방향을 긍정적인 쪽으로 돌렸다는 것입니다.

1985년에 고문 사실을 폭로하였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재야와 야당이 연대하여 고문 등 용공 조작 대책위를 만들고, 그것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대책위로, 다시 박종철 치사 사건의 대책위로 이어져서, 궁극적으로 뒤에 1987년의 6.10민주대항쟁을 이끈 “국민운동본부”결성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으로 나는 족합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폄하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서로 어깨를 겯고 심장을 나누어 가지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과분한 평가를 받았고, 덕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오랜 친구 조영래, 후배 김병곤, 이범영, 지금 몹시 아픈 이을호를 비롯해서 이름 없이 역사의 책무에 충실했던, 소리없이 그들을 도왔던 이들에게 항상 미안한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의 보상은 그 분들의 것입니다.

출처 : 1998년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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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이 되어

상록수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한편, 경제복지회라는 서클에도 가입해서 진지하게 연구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독재 통치는 갈수록 도를 더해 갔습니다. 1967년에 나는 서울 상대 대의원회 회장이 되어, 결국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끌려가서 매맞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지를, 그 일로 강제 징집을 당했고, 1970년에 제대하여 학교에 복학하였습니다.

조용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사회 상황은 철권 통치의 막다른 길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1971년 11월 13일 전태일이 죽었고,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초헌법적 비상 조치인 유신헌법을 발표하였습니다. 나는 모른체할 수가 없었고, 그 현장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971년부터 어쩔 수 없이 피신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 뒤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하는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980년 “서울의 봄”에 이르러서야 잠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여러 선생님의 도움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장이시던 변형윤 선생님, 나중에 총리가 되신 교무과장 이현재 선생님, 그리고 학생과장 강명규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곤경을 무릅쓰고 피신중이던 나를 졸업시켜 주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의 대학 졸업은 친구와 스승의 합작품인 셈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교수가 되리라는 꿈은 버리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출처: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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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책과 선비, 그리고 계몽

풋내기 자유인

고교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경기고 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가두 시위에 나서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나는 5·16 쿠테타로 인해 정년 단축이 되어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긴 했어도 박정희 권력을 지지하는 쪽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돈을 빌어라도 오겠다는 윤보선보다는, “자립 경제”를 외치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에 얼마쯤 동조했던 것입니다.

경기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면서, 가정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2학년 때부터 입주 과외를 했고, 학원사에서 6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의대나 법대를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적록 색약”이어서 의대는 포기했고, 법대는 일거에 출세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나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버트란드 러셀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참으로 중요하며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류의 구원이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 책은, 한창 경제 발전을 부르짖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뭔가 내게 호소해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결국, 서울대학교 상대 경제학과를 간 것은 경제학 교수가 되어 국민을 계몽하고 싶다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때 나는, 참, 풋내기 자유인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교정을 올라오면서 노랗고 빨갛고 한 꽃들이 새삼스럽게 아름답게 느꼈습니다. 잠시나마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교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애잔한 감정이 스며들기도하고, 또 짙은 상념에 잠기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나라와 사랑을 낭만적으로 꿈꾸던 시절이었습니다.

폭풍처럼 번졌던 데모 후의 휴교령으로 굳게 닫힌 교정을 바라보면서도 여유와 낭만을 잃지 않았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경제학 교수를 희망하던 한 평범한 학생이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 서서 서른 해를 살았고, 어느 순간 정치인이 되어 또 몇 해를 보냈습니다.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지만, 그래도 제가 진실과 일관성을 믿으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고 나서부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래는 좀더 나을 것이라는, 내가 미력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한번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아마도 저를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

2000년 5월 7일, 서울대 경제학과 강연중에서

출처: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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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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