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①] 민청련 창립되던 날

 

17.07.25 15:18l최종 업데이트 17.07.25 15:18l 글: 민청련동지회(demoyouth) 편집: 박정훈(twentyrock)

 

연재를 시작하며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민청련이 창립되던 날 - 민주의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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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에서 만찬 도중 박정희를 저격하여 숨지게 함으로써 길었던 18년 유신체제가 무너졌다. 우리가 맞이한 1980년 봄은 바로 무너진 그 자리에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를 놓고 부푼 기대와 젊음의 열정이 들끓었던 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냉혹한 군사독재로 얼어붙었던 동토에 민주주의의 새잎이 돋아나 온통 푸른 봄의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던 김재규는 곧바로 반란 수괴로 감옥에 갇혔고, 박정희의 후예 신군부 소장파 장교들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앞서 11월 24일에 민주화운동 세력은 유신체제에서와 같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를 열었다가 계엄사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대회는 무산됐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서울의 봄'이 오는 것은 자연순환의 이치처럼 자명한 것으로 믿었다.

1980년 3월 6일, 잔설이 남아 있는 초봄, 육군형무소에서 김재규의 비서실장 박흥주 대령이 총살로 처형됐다. 그래도 우리는 봄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5월 15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온 대학생 5만여 명이 서울역 광장에서 계엄해제를 외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을 때 "봄은 바로 옆, 문밖까지 와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와 재야 지도자들도, 정치의 봄이 오고 있다고, 그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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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봄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민주주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서울의 봄'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신군부의 독재에 저항한 광주 시민 수백 명이 광주항쟁 과정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되었고, 그 기간 중에 김재규와 그의 부하 4명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시 이 땅은 유신독재의 후예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긴 독재의 겨울이 왔다.

그러나 기나긴 유신독재가 막을 내린 후에 우리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던 '서울의 봄'은 단지 한바탕 꿈은 아니었다. 지리산 철쭉꽃이 피어나는 5월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우리 가슴 속에 '서울의 봄'은 다시 생생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꿈이었고, 만주에서 굶주림 속에 조국해방의 일념으로 일제와 싸웠던 독립용사들의 꿈이었다.

무명 순국열사묘역에서 결의를 다지다

광주항쟁이 좌절된 지 3년여의 세월이 지난 1983년 9월 29일 아침. 수유리 4·19묘지 뒷산 순국열사묘역에 있는 독립군 무명용사묘 앞에 일군의 청년들이 모였다. 바로 다음 날인 30일에 있을 민청련 창립대회를 앞두고 민청련 집행부가 될 내정자들이었다.

 수유리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안내판
 수유리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안내판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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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상한 학자풍 얼굴의 김근태 의장 내정자를 비롯해, 뿔테 안경에 장발의 투사형 장영달 부의장 내정자, 이마가 넓은 미남형 박계동 홍보부장 내정자, 다부진 체구에 걸음이 빠른 박우섭 총무부장 내정자, 준수한 외모에 귀공자 타입의 홍성엽 재정부장 내정자, 순발력 있고 재치가 많은 연성수 사회부장 내정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묘는 연성수가 아침 운동으로 백련사 길을 올라다니면서 발견한 장소인데, 창립 전날 결의를 다지기 좋은 장소라 생각하여 제안했던 것이다. 맨몸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할 민청련의 출범을 앞두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 앞에서 출정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 창립대회를 무사히 치르게 해주십사 기원을 담은 고천(告天) 의식이기도 했다.

연성수가 사회를 봤다. 먼저 독립운동에 몸 바친 순국열사들에 대한 묵념을 했다. 이어서 김근태 의장 내정자가 술을 한잔 올리고 제문을 읽었다.

"유세차 1983년 9월 29일에 천지신명과 독립용사들의 영전에 고하나니..."

김근태 의장 내정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북한산의 맑은 가을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천지신명과 무명 독립용사들의 영혼이 출범하는 민청련을 돌봐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는 제문이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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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