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봄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나는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총선을 치르느라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그때, 연락이 왔다. 일본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다. 한일관계의 미래 청사진을 논해 보자는 취지였다. 그동안 의원연맹 등의 이름으로 긴밀히 연계하던 한국 정치인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물갈이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식 초청자는 일본 외무성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초청자는 자민당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집권 여당으로서 새로운 차원의 한일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 방문은 유쾌하지 않았다.

하루 대여섯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는 자민당사, 총리 관저 혹은 음식점을 오가며 일본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과 대화했다. 자민당에 있는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을 5~6명씩 그룹을 지어 만나고 대화했다.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며, 동북아 공동번영의 길을 외면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 중국 모두의 국익에 반하는 것이다” “한일 FTA와 더불어 한중 FTA 그리고 한일중 공동 FTA로 나아가자. EU에 맞먹는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비전을 그리자” “한중일의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 공동체는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일본의 내부 정치를 위해 북한 문제를 활용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별무소득이었다. 자민당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런 나의 주장에 대해 낯설어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서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또한 북한과 중국을 배제하고 주변화 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공식적인 일정은 자민당의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일정은 민주당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는 일로 꽉 짰다. 하토야마 대표, 간 나오토 간사장을 비롯해 얼추 열댓 명의 민주당 지도자들과 토론도 했다. 허름한 맥주 집에서, 어떤 의전도 없이 이뤄지는 단촐한 대화였다.


민주당 의원들과의 대화는 좋았다. 함께 나눠 갖고 있는 공동인식은 소중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끼치고 있는 해악에 대해 같이 걱정했다. 동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을 현해탄 너머 일본에서 만나는 건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나와 하토야마 대표의 의견은 거의 일치했다. 당시 민주당의 지도자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 우리는 언제 집권할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전해오는 것이었다. 


헤어질 때 “우리가 손잡고 일하면 한일 양국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 “다음에는 일본도, 우리도 모두 집권당이 되어 만나자”고 굳은 악수를 나눴다.


5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세계정세는 상당히 변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은 금융위기와 ‘빈익빈 부익부’라는 흉물스러운 본질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제 미국이 추구하고 한국은 물론 일본에게도 강제하였던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준비할 시점이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동아시아의 새로운 동반 성장 전략을 본격화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미국 네오콘의 몰락으로 동북아 평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구상도 날개를 펼 수 있는 시절이 찾아왔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은 집권당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민주당이 집권을 했다. 얼마 전까지 공고한 것처럼 보였던 한미일 냉전 삼각동맹 가운데 두 축이 무너진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도 ‘대화할 수 있는 정권’ ‘미래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지금 한반도는 ‘평화냐? 대결이냐?’의 기로에 서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미국과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두 당 모두 대결적 관계가 아닌 평화와 공동번영의 한반도와 동아시아 건설을 위한 의사가 있다고 기대하고 싶다.


지금만큼 좋은 시기가 없었다. 한반도와 일본, 미국, 중국이 공동으로 냉전적 관계가 아닌 평화번영의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정권재창출에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생겨 버렸다.


우리의 이러한 부족함과 잘못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하지만 감히 말하고 싶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경제공동체의 꿈은 결코 미룰 수 없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3년 반만 기다려 달라. 우리는 다시 일어 설 것이다. 이 김근태도 그 일을 위해 다시 온 몸을 불사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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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근태